남편 탐구생활
남편 탐구생활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19.12.05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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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다시 계란말이다. 남편은 어떤 음식에 꽂히면 한동안 그 음식을 고집하곤 한다. 그중 하나가 계란말이다. 특히, 한 번에 달걀을 다섯 개쯤 풀고 표고버섯, 당근, 파를 송송 썰어 넣어 두툼하게 부치는 걸 좋아한다. 한 달 열흘을 매일 계란말이를 하다가, 나중에는 먹는 사람보다 만드는 내가 질려서 그만 먹기를 부탁한 적도 있었다. 늘 익숙한 음식만 먹는지라 요리하는 데에 별 어려움은 없는데, 요즘은 세 끼 식사를 다 챙겨 주지 못할 때가 있어서 문제다.

지지난 주말 남편은 무척 화가 났었다. 아침에 고등어를 구워 조반을 차려 주며 점심은 알아서 해결하시라 당부하고, 지인의 딸 결혼식을 보러 제천으로 향했다. 출발할 때만 해도 내가 운전해서 한 차로 움직이기로 했다니까 조심해서 잘 갔다 오라며 기분 좋게 배웅까지 해줬다. 그런데 당연히 저녁까지는 돌아올 줄 알고 식사 준비를 안 해 놓고 간 게 화근이었다. 오랜만에 나왔으니 좀 놀다 가자는 일행들과 투합, 의림지에 가서 오리배도 타고, 보랏빛 아스타 꽃밭에서 모델 포즈로 사진도 찍고, 근사한 카페에서 차도 한 잔 마시고. 그러다 본의 아니게 저녁까지 먹게 되었다. 미안하다고 미리 전화까지 했는데 남편은 그 일로 삼 일이나 삐쳐 있었다.

점심 한 끼만 대충 때우면 되겠지 생각했다가, 저녁에 들어와 밥솥을 열어보니 텅 비어 있고, 라면도 없고, 계란말이나 해 먹자 싶어 대파를 썰어 놓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달걀이 없더란다. “파만 안 썰어 놨어도 그렇게 화가 나진 않았을 거야!” 며칠 후 투정부리듯 쏟아붓는 말투에서 `이제 대충 풀렸구나.' 느낌이 왔다. 사 먹는 밥을 싫어하는 남편의 성격을 알아서 될 수 있으면 일이 있을 때는 미리 식사 준비를 해 놓고 나가는 편이다. 하지만 삼식 씨인 남편의 식사를 전부 다 챙기기는 어렵다. 가끔은 이런 일이 생기지만 예전처럼 속을 끓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려고 조금씩 더 노력하게 되는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시작했다. 바깥 활동이 많아질수록 신이 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의 불만은 쌓여갔다. `지금까지 가족을 위해서 살아왔으니 이제부턴 하고 싶은 것은 하며 살고 싶다'대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일에 지장이 있으면 안 된다.', 두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뒤늦게 찾은 꿈과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허무함 중 어느 쪽도 무게가 가볍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이 떠난 빈 둥지 증후군 때문인지, 위로와 관심이 필요한 갱년기 남자라 그런 것인지 어쨌든 골이 깊어지기 전에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나는 매월 칼럼을 마감한 일주일을 남편 탐구주간으로 정하고 남편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딱히 어떤 걸 잘해 주기보다 그냥 남편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랬더니,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던 남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의외로 수다쟁이여서 혼자보다는 사람 사이에 섞여 있는 걸 좋아하고, 미식가는 아닌데 먹고 싶은 음식은 꼭 먹어야 하고, 배가 고프면 예민해진다는 걸 알았다. 관심만으로도 효과가 있어 부딪치는 상황이 많이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요즘 나는 `지금 여기'에 최선을 다하며 산다. 취미활동 열심히 하고 또, 밥상을 차릴 때는 정성을 다해 준비한다. 남편 탐구생활 반년, 이젠 정해진 주간이 아니어도 남편을 살피고, 남편의 배려 또한 확실히 늘었다. 혹시 남편도 아내 탐구생활을 시작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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