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그리움이 더욱 깊어지는
겨울, 그리움이 더욱 깊어지는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12.0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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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아무래도 겨울은 그리움의 계절입니다. 날이 추워지면서 새벽별은 유난히 빛나고, 깜박이며 밤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의 궤적은, 어딘가, 또 누군가에 대해 까닭모를 그리움을 사무치게 합니다.

계절은 사뭇 흐르며 동짓달에 접어들었고, 일주일 남긴 동짓날을 향해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뜬 눈으로 기나 긴 밤을 지새우고 어렴풋이 동쪽 하늘부터 짙은 어둠이 벗겨지고 있는 새벽길. 떨어지는 기온만큼 옹색하게 닫힌 마음을 누군가 자꾸 두드리는 느낌으로 강가를 서성거립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널었다가/ 어른 님 오신 밤이 여든 굽이굽이 펴리라」조선의 여류시인 황진이도 동짓달 기나긴 밤이 못내 서러웠던 가 봅니다. 그리움에 사무친 나머지 긴 밤을 사랑하는 님과 함께 지내고 싶다는 간절함이 애틋합니다.

겨울로 접어드는 동짓달에 유난히 사무치는 그리움은 민요 <밀양 아리랑>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라고 애원하면서도 아리랑 고개를 속절없이 넘어 가면서는 정작 `정든 임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하고 맙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은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며 수줍은 체념으로 되풀이됩니다.

겨울이 그리움으로 더욱 절절하게 깊어지는 것은 남녀상열지사를 초월한 인륜에 있습니다.

동지섣달 긴긴 밤이 짧기만 한 것은/ 근심으로 지새우는 어머님 마음/ 흰머리 잔주름에 늙어만 가시는데/ 한없이 이어지는 모정의 세월/ 아~/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이 일듯/ 어머님 가슴에는 물결만 높네/ 살아 계시든 돌아가셨든, 이 땅의 자식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눈시울을 붉히고 가슴이 먹먹해져 이 노래 <모정의 세월>을 불러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뭇 깊어지는 겨울 초입에 외롭고 쓸쓸하며, 괜스레 서글퍼지는 까닭은 그리움에 있습니다. 일 년을 숨 가쁘게 달려오면서 미처 다하지 못한 목표에 대한 미련도 있겠지요. 그리고 살아오면서 미처 돌아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도 있을 터이고, 유난히 햇살이 짧아진 탓에 광합성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미약한 생체리듬 또한 이 계절 우리를 침잠하게 하는 요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밤이 점점 길어지고 깊어지는 동짓달이 마냥 쇠잔한 것만은 아닙니다. 깊은 밤이 지나야 새벽이 오듯 동짓달은 새로운 기운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한국전통음악은 12개 음이름, 즉 12율명을 사용합니다. 황종, 대려, 태주, 협종, 고선, 중려, 유빈, 임종, 이칙, 남려, 무역, 응종이 그것인데, 모두 농경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 시작인 황종(黃種)은 동지의 절후를 나타내는 것으로 중앙을 상징하는 노란 색깔과 씨 뿌리는 행위를 표현한 것입니다. 동지에 이르러 점점 밤은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면서 비로소 만물이 싹트기 시작함을 음계에 담았으니, 겨울을 마냥 외롭거나 쓸쓸해 할 일만은 아닙니다.

황종이외에 악학궤범에 기록된 12율명 가운데 지금 우리가 느끼는 겨울에 해당하는 대려는 12월을 상징하며 황종을 도와 기(氣)를 펴고 만물을 싹트게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정월에 속하는 태주는 양기가 땅에 크게 모여 겨울잠 자는 동물이 깨고 풀꽃들이 땅 속에서 나오려는 준비의 계절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겨울 초입에 씨 뿌리고, 싹이 움트길 기대하는 것은 요즘 세태와 어울리지 않으며 믿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추위와 더위가 갈수록 폭을 벌려가며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함부로의 사람이 만들어 낸 재앙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탐욕이 만든 모든 번잡함과 괴로움, 그리고 나약함이 커지는 것은 무언가에, 또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 옅어졌기 때문은 아닐까요. 겨울은 그리움을 더욱 깊어지게 하기에 딱 좋은 계절입니다. 나는 요즘 <국악의 향기>에 취해 새벽처럼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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