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비보다 먼저 세워진 충주 고구려비
광개토대왕비보다 먼저 세워진 충주 고구려비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9.12.0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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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 비석인 충주 고구려비는 국보 제205호로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 어귀에 위치하고 있다. 남한강을 바라보는 강어귀 길가 언덕에 작은 전시관에 비석과 함께 고구려와 관련된 역사 교육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충주 고구려비는 자연석 형태를 그대로 이용해 비문을 새겼다. 1979년 발견 당시 마멸이 심해 읽어내기 어려운 글자가 많았다. 모두 500여 자가 새겨진 것으로 보이지만 판독된 건 200여 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고려대왕(高麗大王)',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使者'등 고구려 왕 및 관직의 이름과 `고모루성'의 글자가 보이고 있어 고구려비로 확신하였다. 특히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하면서 고구려가 형이 되고, 신라가 아우가 된다는 기록과 고구려의 국경이 조령과 죽령이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이 비석의 발견으로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는데, 신라를 지칭할 때 `동이'로 신라왕을`매금'으로 열등하게 표기한 점과 신라왕에게 의복과 같은 선물을 하사하는 것을 볼 때 고구려와 신라가 상하관계였음과 신라 영토 안에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음도 밝혀지게 되었다. 특히 남한강이 흐르는 교통의 요지인 이곳에 비석이 세워진 것은 이곳이 고구려엔 신라, 백제를 향한 남방 공략의 요충지였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비석의 크기는 작지만 비석의 모양과 4면 모두에 글씨를 새긴 4면 비의 형식이나 글씨체로 보아 만주의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당시 중국의 비석은 묘비의 용도로 세워진 직사각형의 비석 형태에 양면에 글자를 새긴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동양 최대 규모의 광개토대왕비는 중국적 형식과 내용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돌기둥 형태의 4면 모두에 글씨를 새기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는 중국의 비석 문화를 답습한 것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선돌 문화를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후 신라 봉평비와 진흥왕 순수비로 알려진 마운령비, 황초령비 등으로 이어진다.

충주 고구려비가 기존에는 장수왕 때 고구려의 남하정책과 관련된 유적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번에 충주 고구려비가 광개토대왕비보다 먼저 세워진 것으로 밝혀져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충주 고구려비 발견 4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의 분석으로 연호인 `영락 7년'이란 글자가 판독되었기 때문이다. `영락'이 광개토대왕의 연호이고, 영락 7년을 서기로 환산하면 397년이 되므로 이 비석은 광개토대왕 때 건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역사학계에서는 장수왕(재위 413~491)이나 문자왕(재위 491~519)대에 건립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 왔다. 이번 비석의 판독은 첨단과학기술의 공이 컸다. 고해상도 디지털 사진과 양질의 탁본, 3차원(3D) 스캐닝 데이터, RTI 촬영(다양한 각도에서 조명을 비춰 사진을 찍는 촬영기법) 자료를 확보해 글자를 종합 분석했다고 한다. 좀 더 정확한 고증과 역사학계의 연구결과가 기다려진다.

충주 고구려비가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 비석이라는 사실과 광개토대왕이 세운 비석이라는 점에서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 비석을 통해 우리 아이들의 마음에 대륙을 향해 포효하던 자랑스런 조상 고구려의 기상이 스며들어 통일 한국과 세계를 향해 웅비할 미래 한국을 준비하고 나아가는 초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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