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 올인이 묘수일까
필리버스터 올인이 묘수일까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9.12.01 1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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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필리버스터는 의회에서 소수정당이나 세력이 다수당의 독주를 막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이다. `무제한 토론'으로 번역되듯이, 신청한 정당이나 의원이 장시간 연설로 법안처리나 표결 등 의사진행을 고의적으로 저지·지연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필리버스터의 전범을 보여줬다. 야당 의원 시절인 지난 1964년 동료 의원의 구속동의안이 본회의에 상정되자 필리버스터에 나서 5시간 19분 동안 발언했다. 안건을 부결시켰으니 완벽한 필리버스터에 해당된다.

필리버스터는 1973년 의원 발언시간을 45분까지로 제한하는 국회법이 시행돼 폐기됐다가 2012년 국회선진화법이 도입되면서 부활했다. 그리고 2016년 더불어민주당이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필리버스터의 역사를 새로이 썼다. 민주당은 그해 2월 23일부터 3월 2일까지 총 38명의 의원이 192시간 27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이어 나갔다. 여당인 새누리당이 발의해 상정한 테러방지법을 저지하기 위해 시도한 이 필리버스터는 세계 최장 기록이 됐다. 당시 필리버스터는 더 길어질 수도 있었다. 당내에선 필리버스터를 연장하자는 강경론이 만만찮았지만 선거구 획정 등을 담은 선거법 개정안 처리시한이 임박하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테러방지법은 바로 표결에 부쳐져 통과됐으니 성공작이 되지는 못했다.

자유한국당이 지난 29일 본회의에 상정될 199개 안건 모두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신청하면서 필리버스터가 새삼 세간의 관심사가 됐다. 한국당은 전체 의원 108명이 필리버스터에 나서 각각 4시간씩 발언할 것이라고 한다. 4시간도 필요 없다. 정기국회 회기가 끝나는 10일까지 1인당 2시간씩만 발언대에 서도 예산안을 제외한 모든 안건의 상정을 막을 수 있다. 한국당의 목표는 패스트트랙 안건인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법의 무산이다. 그러나 특정 안건이 아니라 상정될 안건 전체를 대상으로 한 필리버스터는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이 가운데 50건은 한국당이 발의한 안건이다. 자당이 발의한 안건까지 저지 대상에 넣은 셈이 된다. 목표로 한 법안을 무산시킬 가능성을 높이려는 고육책으로 읽혀지지만 당장 여론의 반응이 차갑다.

특히 어린이 교통안전을 위한 `민식이법'처리가 지연되면서 후폭풍이 한국당에 집중되는 분위기다. “우리 민식이가 왜 그들의 협상카드가 돼야 하느냐”는 민식이 어머니의 절규는 한국당에 비수가 됐다. 나경원 원내대표가 “5개 법안을 제외하고는 우선 처리하자고 여당에 제안했었다”며 물러섰지만 초장부터 무리수를 뒀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게 됐다.

한국당은 황교안 대표 단식으로 당 지지율이 소폭 오르는 등 긍정적 효과를 봤다지만 필리버스터에서도 약효를 볼지는 의문이다. 지난 2016년 민주당이 필리버스터 세계 최장 기록을 경신해가는 동안에도 당 지지율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 당시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던 주간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새누리당은 전주보다 1.8% 상승한 43.5%, 민주당은 전주와 동일한 26.7%가 나왔다.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새누리당이 전주와 동일한 42%, 민주당은 1% 하락한 19%로 나왔다. 민주당이 필리버스터를 중단한 데는 시큰둥한 여론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회기가 바뀌면 동일 사안에 대해 재차 필리버스터를 할 수 없어 성공률이 그렇게 높지도 않다.

`정신 차리자 한순간 훅 간다'. 민주당이 세계 최장 필리버스터 기록을 세우는 동안 새누리당 회의실 백보드에 등장했던 문구다. 당이 국민을 상대로 쓴소리를 공모해 뽑은 문구였다. 새누리당은 이 문구와 함께 환골탈태를 공언하며 민심에 읍소했지만 그해 총선에서 친박·진박논란에 공천 파행까지 겹치며 야당으로 전락했다. 지난 총선에서 `정신 차리자 한순간 훅 간다'는 상황인식과 셀프경고가 왜 공염불에 그쳤는지 되짚는 것이 한국당에는 필리버스터보다 더 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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