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을 권리
상처받을 권리
  • 양철기 교육심리 박사·원남초 교장
  • 승인 2019.11.2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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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보는 세상만사
양철기 교육심리 박사·원남초 교장
양철기 교육심리 박사·원남초 교장

 

어느 때부터인가 TV를 켜면 멍하고 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나는 자연인'이다. 흔히 남자 직장인들의 로망이라는 자연인의 생활은 부럽기만 하다. TV 속의 자연인들은 산중에 들어오기 전에 마음에 큰 상처와 고통을 받은 사람들임을 스스로 고백한다. 그리고 자연속에 살면서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한다. 그들의 생활이 부러우면서도 세상과 약간 격리된 삶이 그분들의 상처를 얼마나 치유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필자는 대체로 쉽게 상처받고 오래 고통받는 성격의 소유자다. 그래서인지 사람의 내면과 상처 문제에 관심이 많아 이 분야를 공부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상처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상처를 받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안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상처와 고통 없이 살 수 없는 걸까?

철학자 토드 메이(Todd May)는 그의 저서 `부서지기 쉬운 삶(A Fragile Life: Accepting Our Vulnerability)'에서 상처에 취약한 인간의 본성과 상처의 본질에 대해 다루고 있다.

상처받고 싶은 사람은 없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상처를 적게 받고 받더라도 빨리 회복하는 방법밖에 없다. 자기개발서나 상담 등에는 자존감을 높이고 있는 그대로 자기를 드러내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라고 하며 상처받지 말라고 한다. 또 상처 주는 사람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고 하다. 불교, 도교, 서양철학 등에서도 삶의 괴로움, 욕망, 집착,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삶의 초연함, 마음의 평온 등을 강조한다.

이것이 진짜 가능한가?

토드 메이는 인류의 스승들이 추구했던 고통과 상처에 영향받지 않는 초연한 삶의 태도가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 아닐 수 있다며 도발적이지만 동시에 인간적인 관점에서 상처받음과 극복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우리 삶에 내재 된 시련을 검토해 가면서 상처와 고통에 대한 취약성,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이 인간성의 중요한 특성임을 보여준다. 상처받지 않음보다 상처받음이 인생에서 더 매력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주장한다.

사람이 상처나 고통에 취약함은 자연적이고 생득적인 것이며, 인생은 언제나 고통받을 가능성에 노출돼 있다. 이러한 현실을 무시한 채 TV 프로그램의 `자연인'처럼 평온함을 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자신의 삶에 기반하고 있는 상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토드 메이는 말한다 “나 자신은 위태로운 존재이지만, 반드시 파별한 운명은 아니다”라고. 상처와 고통에 초연해지기보다 받아들임으로 그것과 친해져야 함을 느낀다. 인생에는 상처와 고통이 반드시 있으며, 인간은 결국 병들어 죽는다. 그래서 인생은 본질적으로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순간의 행복을 찾기보다는 인생의 의미를 찾고 그에 따라 삶의 목표를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은 혼돈과 질서가 반복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사이에서 조화로운 경계를 찾아야 인생의 어려운 시기가 닥쳤을 때 쓰러지지 않고 겸허히 그것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상처와 고통, 기쁨이 뒤범벅된 채로 나와 함께 있다.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상처와 고통을 극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상처와 고통을 초월하는 태도가 아니라 기꺼이 그 고통을 들여다보거나 때로는 상처와 고통을 껴안는 삶의 방식 또한 어쩌면 삶의 지혜가 될 것이다. 상처와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더 잘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 먼저 인생의 조용한 슬픔을 받아들일 줄 알고 상처와 고통에 대한 취약성을 겸허히 인정하면 우리에게 상처받을 권리가 주어질 것이다.

시인 정현종의 `방문객'을 조용히 읽어본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중략/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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