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이 있었기에
그 시절이 있었기에
  •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 승인 2019.11.2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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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정말이지 그때는 불행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불행할 겨를이 없어서 그랬고, 남들도 다들 그렇게 살아서 그랬습니다.

슬픔이 없진 않았지만, 아픔과 고통이 없진 않았지만 그리하여 좌절도 하고 분노도 했었지만 살다 보면 의당 있는 일이라고. 시련일지언정 불행은 아니라고.

적어도 55년 전에는 그렇게들 살았습니다.

그 시절 의·식·주 상태와 생활상을 보면 명료해집니다.

번듯한 직장이 있거나, 자영업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입에 풀칠하기 급급한 삶을 살았거든요.

쌀이 귀해 멀건 수제비국과 강냉이 죽으로, 아린 감자가 더 많이 든 보리밥이나 좁쌀 밥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고, 보릿고개 때는 이마저도 부족해 끼니를 거르기도 하고 물로 배를 채우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오죽하면 어머니가 학교 가는 자식에게 배 꺼지니 뛰지 말고 가라고 했을까요.

오죽했으면 아이들이 `하얀 이밥을 배불리 먹어보는 게 소원'이라 했겠어요.

형편이 그렇다 보니 입 하나라도 줄이려고 딸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방직공장이나 가발공장에 취직해 공순이로 살았고, 아들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기 무섭게 군대에 자원입대하거나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상경해 이산가족이 된 집이 많았죠.

뒷간이라 불렀던 화장실이 집 밖에 있어 밤에는 요강을 방 안에 두고 소변을 봤지만 큰 볼일이 생기면 도깨비 나올까 무서워 형이나 누나를 보초 세우고 뒷간에서 일을 봐야했습니다.

밤이면 호롱불을 켜놓고 어머니가 가족들이 벗어놓은 구멍 난 양말과 헤진 옷가지를 꿰맸고, 자식들이 입었던 속내의를 벗겨 기생하고 있는 이를 잡는데 아이들은 이불 속에 누어 호롱불에 지져지는 타닥타닥 이 타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기도 했죠.

한여름에는 마당에 있는 펌프 물이나 우물에서 길어온 물로 등물을 하며 더위를 이겨냈고, 한겨울에는 화롯불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군불 땐 아랫목에 엉덩이를 지지며 추위를 이겨냈습니다.

형들에게 물려받은 헌 교과서와 몽당연필이 든 필통과 너덜너덜한 공책을 보자기에 싸서 어깨에 들쳐 메고 10여 리가 족히 되는 초등학교를 밑바닥이 헤진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미술시간에는 잘 안 써지는 연필심에 침을 발라서 스케치하고 크레용과 도화지 살 돈이 없어 조그만 힘을 주면 심이 쉬 부러지는 색연필로 비로포대 위에 그림을 그렸죠.

방과 후에 남자 아이들은 들판에 가서 소꼴도 베고, 지게 지고 산으로 가서 땔감도 해왔으며, 여자아이들은 어머니 부엌일과 잔심부름을 하며 자랐습니다.

그렇게 춥고 배고프게 살았지만 부모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남의 것을 탐하거나 훔치지도 않았으며,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올 거라 자위하며 살았지요.

어쩌다 시루떡을 할 때면 이웃부터 한 접시 돌리고 먹었듯이 자신의 안위보다 이웃과 공동체의 안위를 우선했고 나보다 못한 이를 연민하고 배려하며 살았습니다.

가진 거라곤 몸뚱이 하나뿐이라서 다들 허리가 휘도록 일했고 자식들을 억척스럽게 가르치고 성가시켰죠.

그렇게 가족을 건사하며 수출산업의 역군이 되었고 한강의 기적을 창출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중에는 독일에 간호사와 광부로, 아랍에 건설노무자로, 베트남전쟁 참전용사로 이국땅에 가서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외화벌이를 해 가정경제는 물론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의지의 한국인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50줄에 들어선 그들의 아들딸들 역시 서슬 퍼런 군사독재에 맞서 끝내 민주주의를 견인하고 쟁취한 자랑스러운 세대들입니다.

안타깝게도 요즘 젊은이들은 그런 그들을 꼰대라 비하하고 용도폐기하려 합니다. 냉전적 사고의 편향성과 압축성장의 폐해의 어두운 그늘과 상처가 없진 않지만 이 또한 감내해야 할 시대적 산물이지 배척하거나 침 뱉을 일이 결코 아닙니다.

방탄소년단이 세계무대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것도, 여자골프선수들이 세계를 주름잡는 것도 그렇게 살아온 선대들의 DNA를 물려받았기 때문임을 상기하고자 함입니다. 잘 살아야 합니다. 지속가능하게.

/시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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