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꽃은 꽃잎을 열지 않는다
11월 꽃은 꽃잎을 열지 않는다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19.11.27 19: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들은 스산하다. 바람이 휑한 들판을 머물지 못하고 바로 떠나간다. 가을걷이를 끝낸 빈 논에 돌돌 말려진 볏짚이 가을의 흔적으로 뒹굴고 있다. 꼭 흰 설탕을 발라놓은 마시멜로 같다. 햇살도 사위어 누그러진걸 보면 소설(小雪) 앞에 주눅이 들은 게다. 가을도 아닌, 겨울도 아닌 어슬한 이즈음이 나는 일 년 중 가장 쓸쓸하다.

바람이 서릿발 같은 독기를 품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다. 차라리 겨울이면 추위에 무장이라도 하련만 무방비상태로 견딘다. 두꺼운 외투를 입기도, 목도리를 두르기도 애매하다. 별로 춥지 않을 거라 생각해 가볍게 입어 떨고 보내는 시기가 있어야 드디어 겨울이 온다.

11월에 핀 꽃도 마찬가지다. 농막의 다른 꽃들은 찬기가 볼기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져버렸다. 오롯이 홀로 견디는 꽃을 보았다. 쌀쌀한 바람에 귓불까지 붉다. 입술 같은 꽃잎을 벌려야 수술이 밖으로 나와 활짝 필 테지만 앙다물고 있다. 아마도 사투 중인 듯했다.

얇은 꽃잎이 웅크리고 추위를 견딘다. 안에서는 숨이 막혀 꽃술들이 속살거려도 차마 봉우리를 열지 못하고 있다. 며칠째 그대로다. 바람과 맞설 자신이 없어서인 게지. 여는 순간 꽁꽁 얼어버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처연히 참을 인을 힘껏 수행하고 있다. 한없이 애처롭다.

겨울을 견디라는 가혹한 이름을 가진 인동초(忍冬草). 풀 초자가 붙은 특이한 나무다. 5월부터 피었으니 끈기가 따라올 꽃이 없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일진대 이다지 피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볼 끝이 시린 서리에도 견뎌야 하는 이름을 가진 숙명의 몸부림인 듯싶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별명이 인동초다. 어떤 악조건에서도 잘 자라는 성질을 따서 붙였다고 한다. 현대사에서 이만큼 격렬한 삶의 풍랑을 몸소 겪은 사람도 드물다. 5차례의 가택연금과 6년의 감방생활, 두 차례의 망명길. 사형선고에 납치까지 수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긴 분이다. 민주화 투쟁과 남북화해협력을 위해 험난한 시련을 딛고 일어선 투사다. 별명 안에 일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50여 년간 지속되어 온 한반도 냉전관계에서 상호불신과 적대관계를 정리하고 평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고생한 끝이 빛을 본 것임에랴. 옥중 서신에서도 인동(忍冬)은 고스란히 들어있다. 전진할 때 주저하지 말며 인내해야 할 때 초조하지 말며 후회해야 할 때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고 썼다.

쉰이 되기까지 초조하게 살았다. 워낙 없이 시작한 살림이어서 나아지지 않는 가세에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천원이 없는 것도 아닌데 양말 한 짝을 사신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이런 나를 피붙이들은 주변머리 없다고 했다. 여유가 없으니 미처 생각이 미치질 못했다.

초조가 불안을 키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이었다. 언제 이 안개가 걷힐지 막막했다. 자식을 둔 부모로, 한 가정을 지킬 책임을 가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견디는 일이었다. 인내하는 길 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참아낸 날들이 겨울을 이겨낸 셈이어서 다행이다. 장자크 루소의 “인내는 쓰되 그 열매는 달다”는 말을 피부 속까지 느끼고 있는 중이다.

살을 에는 바람이 인동초 꽃에 머문다. 입술을 꽉 오므린 봉우리에 故 김대중 대통령의 얼굴이 투영된다. 11월의 인동초가 꽃잎을 열지 않는 건 지금 안으로 사력을 다해 인내하고 있는 것이리라. 꽃이 아파 지르는 소리를 안으로 삼키고 있는 것이리라. 순순히 받아들이며 결코 초조해하지 않는 모습이다.

인동초 넝쿨 하나가 내내 마음을 휘감고 내 척박한 땅으로 밀고 들어온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