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DNA와 지소미아 종료 유예
친일 DNA와 지소미아 종료 유예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11.2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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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유니클로 매장을 지나 삼겹살거리에서 김남균을 만났다. 내가 그를 그냥 `김남균'이라고 칭하는 결례를 용서하기 바란다.

이름은 서로 알고 있었으나 대면은 처음이어서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나서야 서로 통했다. 나는 어딘가 결이 다른 그의 기사를 즐겨보고 있고, 탐사 혹은 심층보도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헤어질 무렵 그가 책을 한 권 내밀었다. 내 이름과, 선배라는 부끄러운 호칭을 속표지에 정성껏 적어 그가 내게 선물한 책에는 <불망(不忘), 그들이 빗돌이 먼지가 되도록>이라는 제목에 `충북지역 친일 잔재 답사기'라는 부제가 적혀 있다. 불콰한 상태임에도 책을 펼쳐보지 않을 수 없었고, 거기 “일제강점기 저들은 조선의 민중을 모욕하기 위해 조선시대 현감과 군수의 공덕비를 자신들의 관사 주춧돌로 사용해 훼손했는데 우리는 친일인사의 공덕비를 신줏단지처럼 받들었습니다. 이 땅은 친일잔재들이 도처에 살아 있는 거대한 박물관이었습니다.”라고 쓴 책머리 글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친일잔재에 대한 처리방법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없애버리는 것도 방법이고 단죄문을 세우는 것도 방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친일잔재에 대한 인식입니다. 친일잔재인지 모른다면 단죄문을 세울 수도 없고 없애 버릴 수도 없습니다.”

지소미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정부의 논쟁을 보며 김남균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일부만 동의하는 쪽으로 나는 기울었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가장 먼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친일잔재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반민족행위 조사 및 처벌을 위한 특별위원회(반민특위)는 출범 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그 배경에 해방 후 질서유지의 명목으로 일제강점기에 동포 탄압에 앞장섰던 친일파를 고스란히 받아들인 미군정과 집권에만 혈안이 된 수구세력이 있다.

`빗돌'을 포함한 물질적 친일잔재는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닐 수도 있다. 그까짓 거 부수고 허물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조사하여 단죄를 하거나 용서, 혹은 반성과 화해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친일세력이 남아 있는 한 정신은 절대로 맑아질 수 없다. 하물며 우리 사회 곳곳의 가진 자와 권력 지도층, 그리고 호의호식하는 무리들 가운데 친일의 프레임에 자유로운 경우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니 말하는 입만 아플 뿐이다.

나는 친일을 칭송하는 흉물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단죄문을 세우거나 백성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만드는 방법의 주장이 끝내 미심쩍다. 우리와 공공연히 섞여 있는 그들 친일세력들은 필요할 때마다 고개를 숙이거나 치켜드는 일을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그리고 수도 없이 되풀이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나는 치욕적인 역사를 통해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 역시 씻어내지 못해 무지막지하게 남아 있는 친일 잔재의 희미한 흔적에서 비롯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철저하고 완벽하게 반민족 행위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만행의 물질적, 인적, 정신적 잔재를 쓸어내고 맑고 깨끗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시도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일본의 침략근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저지른 일본의 명분은 중국과 인도까지 지배하겠다는 야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어 19세기에는 조선 정부의 무례함과 무사도 정신을 통한 개방론으로 정한론을 들먹이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당시 일본은 미국을 귀신과 축생, 즉 귀축으로 일컬었다. 그렇게 치를 떨던 미국에, 패전한 이후 지금껏 굴종의 자세로 일관해 온 일본이 미국을 등에 업고 얻어낸 것이 지소미아인데, 일본은 전략물자와 북한을 들먹이며 수출규제로 한국을 공격한 것이 지금까지의 진실이다.

지소미아는 현재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종료 유예'된 상태다. 우리의 의지로 언제든, 얼마든 종료를 할 수 있는 것을 `외교적 완패'로 단정하고 있는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대한민국의 수구 언론에 의해서다. 열등감과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이 자꾸만 헛소리를 하는 것은 우리 안의 적들을 믿기 때문이다. 이 땅에 남아있는 모든 친일부역의 유전자와 친일의 잔재를 말끔하게 쓸어 버려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이 땅의 더 많은 김남균들이 두 눈 부릅뜨고 살아가야 할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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