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색 우산
오렌지색 우산
  • 엄남희 농업회사법인 ㈜두봉 대표
  • 승인 2019.11.2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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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담 시골살이
엄남희 농업회사법인 ㈜두봉 대표
엄남희 농업회사법인 ㈜두봉 대표

 

새벽 5시 30분. 어김없이 울리는 알람 소리로 잠에서 깼다. 어깨가 뻑뻑한 것이, 컨디션이 좋지 않다. (일어나야 하는데…일어나야 하는데…) 마음은 벌써 일어나 쌀을 씻고 있었지만, 손은 이불깃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후둑! 후둑! 톡!~ 톡!~ 톡! 처마에 떨어지는 일정한 소리. 와우! 맞다. 비다! 비가 내린다. 잠이 확 깼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문을 활짝 열었다. 역시 비가 내린다. 좋았다. 진짜 좋았다. 아침 준비를 하면서 얼른 나가고 싶었다. 열심히 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우산이 쓰고 싶어서였다.

선진님과 나의 어린 시절, 가난했던 우리 집은 변변한 우산이 없었다. 형제자매 모두 4남매이고 제대로 된 우산이 없다 보니 비가 내리면 쓸 만한 우산이 없었다. 겨우 있는 것이라곤 구멍 나서 비가 새거나 우산대가 녹슬어 옷깃에 스치기라도 하면, 하얀 교복 위에 녹물이 누렇게 스며들기 십상이었다. 우산살은 부러져 한쪽이 내려앉은 시커멓고 꾸깃꾸깃한 내 기억 속의 우산! 그마저도 숫자가 모자라 비료 포대 접은 것을 뒤집어쓰고 다녀야 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읍내 잘 나가는 집의 몇몇 아이들을 보면 노랑 빨강의 번쩍이는 우산을 쓰고 다닌다. 색깔이 곱고 예쁜 것은 물론이거니와, 투명한 비닐로 한 겹 더 씌워져 있어 비 샐 염려가 전혀 없는데다, 우산살 끝마다 동그란 플라스틱 구슬이 달려 있었는데, 우린 어디서 판매하는지조차도 모르는 그런 예쁜 우산을 들고 다녔다. 빨간색 장화까지 신고.

몇 달 전, 남편과 함께 대형 마트를 다녀왔다. 이것저것 쇼핑을 하고 막 계산을 하려는데 내 눈길을 잡아당긴 것이 있었다. 우산을 판매하는 코너였는데, 알록달록한 우산들이 진열대에 줄 맞춰 놓여 있었다. “우와! 예쁜 우산 무척 많네? 우산 하나 사고 싶다.” 그렇게 튀어나온 내 말에, 그 사람은 집에 우산 많은데 뭣 때문에 사느냐며 반응이 시큰둥했다.

하긴! 지금 우리 집엔 우산이 많다. 요즘은 금융기관이라든가 보험회사 홍보용으로도 우산이고 남편의 회사에서도 우산을 가끔씩 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껏 내 손으로 우산을 골라본 기억이 없다. “응. 집에 우산 많지 참! 그런데 집에 있는 건 안 예쁘잖아. 거의 시커멓거나 체크무늬인데 난 예쁜 우산이 갖고 싶어…” 우산이 비만 안 새면 됐지. 무슨 예쁜 걸 따지냐는 핀잔을 들으며 우산 사는 걸 포기해야 했다. 못내 아쉬운 마음에 자꾸 그쪽을 흘낏거리는 내가 불쌍했던지 그 사람은 “그럼 하나 사든지…” 인심 쓰듯 중얼거렸다. 그 말끝에 얼른 다시 쫓아가 우산을 골랐다. 이게 예뻐? 저게 예뻐? 하면서. 고민 끝에 오렌지색 삼단 접는 우산을 골랐고, 히죽히죽 웃으며 우산을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그 사람은 한심한 듯 바라보며 그렇게 좋으냐고 했다. 응. 좋아. 그럼 좋고말고! 무척 좋지.

그렇게 내 맘에 꼭 드는 우산을 골라왔는데, 도대체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비도 잘 안 내리거니와 내린다 해도 꼭 아침에는 맑았다가 출근한 후인 한낮에 후둑 후둑 떨어지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 드디어 비가 내린 것이다. 너무 기뻤다. 흥얼흥얼 대충 집을 정리하고 우산을 챙겨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어머! 이게 뭐야! 새벽에 후둑거리던 그 비가 아침밥 해먹는 사이 완전히 그쳤던 것이다. 속상한 마음에 어디 떨어지는 빗방울 없나 열심히 살펴봤지만 무심한 하늘은 어느 사이 그쳤는지 마당에 깔린 블록이 희끗희끗 말라가고 있었다. 결국 우산은 펼쳐보지도 못한 채 오늘 중으로 비가 오길 기다리며 가방 속에 넣었다.

지금 창밖엔 비가 내린다. 가슴이 설렌다. 제발 그치지 말고 퇴근시간까지 내려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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