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라, 대학이여
돌아오라, 대학이여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11.1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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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우리가 통칭 수능으로 부르는 시험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정식 명칭이다. 말 그대로 대학 교육에 필요한 수학 능력을 측정하는 과정이다. 12년 동안의 정규교과과정을 비롯해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는 동안 대학에 진학하여 가르침과 배움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따져보는 시험 일 뿐이다.

이를 주관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이 같은 보편타당의 기본 외에 선발의 공정성과 객관성 확보,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에 맞는 출제로 고등학교 학교 교육의 정상화 기여, 개별 교과의 특성을 바탕으로 신뢰도와 타당도를 갖춘 시험으로서 공정성과 객관성 높은 대입 전형자료 제공을 성격 및 목적에 내세우고 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수능을 얼마나 절대적 명제로 내세우고 있는지는 그 시험에 대한 서술을 문법적으로 `~로서'라는 자격격 조사를 사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로써'로 대표되는 기구격조사 따위로는 용납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강요한다.

기구격조사는 체언이나 체언구실을 하는 말 뒤에 붙어서 그 체언 다음에 오는 용언의 내용을 실현하는 기구가 됨을 보이는 부사격 조사를 뜻한다. 반면 자격격조사는 자격을 나타내는 부사격조사로 간단히 설명되어 있다.<국립국어원 우리말샘> 그만큼 수능은 독보적이고 권위적인 존재로 대접받고 있는 셈이다. `~로서'와 `~로써'의 차이는 독립적이고 결과 중심의 견해와, 보조적이고 과정 중심의 가치 기준에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대학이 국민 생활에 있어서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과정에 용해되어 있다. 대한민국에서 대학에 진학하지 않거나 못하는 경우 정상적인 사람으로 대접받기를 기대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심지어 사정이 허락하지 않아 고졸 취업이 불가피한 경우에도 차별과 불공정에 시달리다 못해 직장을 그만두면서까지 다시 대학 진학의 고단한 일정을 택해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단순히 대학에 진학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엄격하게 존재하는 대학의 서열이다. SKY로 대표되는 명문과 인-서울이라는 황금빛 굴레에 포함되는 특권적 서열에서의 우위를 위해 고등학교가 서열화 되었고, 또 능력있는 부모찬스를 통해 공정함이 무너져 내린 현실에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일이 어디 `조국사태'뿐이겠는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당당하게 제시하고 있는 `시험'에 대한 맹목적 `격'의 부여가 버젓이 살아 있는 한, 정시 확대와 수시의 유지로 견해가 갈리는 처방 모두 만능의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수능은 대학에서 제대로 배움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임이 흔들릴 수 없는 근본이다. 그걸 공정성이라는 당연함을 위해 정시이거나 수시이거나 이익과 편의, 지역 차별, 그리고 자기중심적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수험생을 줄 세우려는 시도는 임기응변에 불과하다.

그동안의 우리 사회는 수없이 많은 폴리페서들에게 휘둘려 왔다. 국정이든 지방정부든, 심지어는 시민사회단체에 이르기까지 폴리페서들은 정권교체를 가리지 않고 버티고 있다. 대학의 서열화와 SKY로 차별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주의는, 불공정과 기회주의적 속성으로 대학을 떠나 권력의 주위에 기생하고 있는 폴리페서들이 만들어 고착화 시키고 있는 모순에서 비롯된다.

시험이 절대적인 `격'을 유지하고 있는 수능의 권능과. 입학 이후의 일을 고민하는 흔적은 우리 사회 전반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12년 동안을 박 터지게 공부하면서 청춘이 시들어버린 획일화된 교육정책에서 그들을 해방시켜야 하는 일은 대학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도 매년 5만 명을 넘나드는 수능 수험생들에게 수능 다음의 일은 아무도 제시하지 않는다.

대학은 이들 청춘들에게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이며, 인간이 지속가능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지를 성찰하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대학들이 차별 없는 진리로 나아갈 때 정시가 어떻고 수시가 어떠니 하는 시시비비는 필요 없다. 대학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공시에만 매달려 시들고 있는 청춘을 보시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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