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꿈꾸었던 미래를 살아가는 우리
누군가 꿈꾸었던 미래를 살아가는 우리
  • 박소연 충북도문화재연구원 교육활용팀장
  • 승인 2019.11.1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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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박소연 충북도문화재연구원 교육활용팀장
박소연 충북도문화재연구원 교육활용팀장

 

쌀쌀해진 날씨를 실감하며 달력을 넘기다 보니,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이 눈에 들어온다. 이 날은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선열의 얼과 위훈을 기리기 위해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처음으로 제정한 날이다.

그런데 11월 17일은 바로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이 맺어진 날이기도 하다. 1905년 11월 17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 아래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이 조약 체결에 찬성함으로써 우리가 흔히 아는 `을사조약(한일협상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강압에 의해 억지로 맺어진 조약이기에 을사늑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우리나라는 주권을 상실하고 모든 외교권을 박탈당했으며, 일본은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각 분야에서 대한제국을 간섭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때의 나라 분위기가 얼마나 침통하고 서글펐는지는 `을씨년스럽다'라는 말 속에서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날이 스산하거나 쓸쓸할 때 을씨년스럽다고 말하는데, 이 말의 어원은 `을사년(乙巳年)스럽다'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때 을사년은 바로 1905년을 말하는데, 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그날의 원통하고 절망스러운 국민의 마음이 그대로 녹아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을사늑약에 대한 절망감은 이렇듯 말로만 표현된 것은 아니었고, 국민은 각자의 방식으로 일본에 강렬하게 저항하였다. 유생과 관리들은 조약을 체결한 대신들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며, 민영환을 비롯한 수많은 열사는 자결하여 뜻을 보이기도 하였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여 일본의 부당함을 알렸고, 수천 명의 민중은 조약 무효 시위를 벌였다. 상인들은 상점문을 닫고 투쟁했으며, 전국 곳곳에서는 의병들도 일어났다.

한편, 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막지 못했던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였다. 특히 1907년 세계 47개국이 모이는 헤이그 제2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해 대한제국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큰 뜻을 품고 떠났던 헤이그 특사는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 볼 수도 없었다. 결국 특사들은 회의장 밖에서 열심히 활동하여 몇몇 해외 언론에 일본의 만행을 알릴 수 있었다.

한편, 일본은 몰래 특사를 파견했다는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으며, 특사로 파견되었던 이상설과 이위종은 일본에 의해 각각 교수형과 무기형을 선고받고 더 이상 우리나라에 돌아올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리기도 하였다.

가까이 진천 산척리에 헤이그 특사 이상설의 생가와 사당이 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어버린 뒤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맞섰던,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모두 `독립'하나였던 당시의 수많은 청춘들. 그들 덕분에 지금 우리가 평안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이번 주말 진천으로 발걸음 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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