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따뜻한 말 한마디
수능, 따뜻한 말 한마디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19.11.11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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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퇴근길에 제과점을 들렀다. 지인의 아이가 올해 고3 수험생이라 작은 선물이라도 할 요량이었다. 모서리 한쪽 코너에 알록달록 수능선물 세트들이 눈에 들어왔다. 합격을 기원하는 엿과 찹쌀떡 등 전통적인 응원의 선물부터 초콜릿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재치 넘치는 언어로 수능생을 응원하는 문구들도 시선을 끌어당겼다. 어떤 걸 고를까 내심 고민하며 둘러보다 문득 내 아이의 수험생 시절이 떠올랐다.

지지난해 내 아이도 혹독한 고3 수험생의 과정을 겪었다. 고슴도치마냥 한껏 가시를 세우고 까칠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집안의 서열 순위를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텔레비전에서도 연일 수험생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소개되었다. 앞으로 며칠 남았다는 둥, 수험생을 위한 건강관리법 등 세상은 온통 고3 수험생을 위해서만 돌아가는 거대한 시계 같았다. 얼른 수능일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까칠함은 사라지고 예전의 그 다정다감한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아이로 돌아와 주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런데 대학수학능력평가 날짜를 열두 시간 앞두고 교육부는 돌연 시험을 일주일 연기한다는 발표를 했다. 포항 지역에 지진이 일어났기 때문이란다. 대중매체에서는 1994년 대학수학능력평가 시험제도가 시행된 이래 자연재해로 시험이 미뤄진 초유의 사태라며 시험연기를 보도했다. 그야말로 `하필이면'이었지만 포항지역의 지진은 생각보다 깊었고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의 흔들리는 불안감은 내 아이의 시험보다도 훨씬 중요한 삶의 문제가 아니던가. 일주일 유보된 시험일로 아이들은 더는 보지 않으리라 던져버렸던 수험서들을 되찾느라 학교 쓰레기장을 헤집으며 야단법석의 진풍경들이 이곳저곳에서 목격되었다.

덤과도 같은 일주일을 견디고 다시 아이는 시험일을 맞이했다. 이른 새벽부터 아침밥과 도시락에 정성을 들였다. 앞으로 이 녀석이 살아나갈 삶의 한 획을 긋는 인생의 변곡점이 될 수도 있는 날이라고 생각하니 매사에 신경이 쓰였다. 나의 아들만을 위한 온기 백배 밥상을 차렸다. 든든하게 먹고, 집중해서 시험에 임해, 지금까지 노력했던 시간이 좋은 결과로 끝을 맺었으면 싶었다. 아주 오래전 나의 엄마나 할머니께서 마당가 장독대에 정안수를 올리던 심정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이른 아침, 가방을 메고 현관문을 나서던 아이가 갑자기 돌아왔다. 그리고 남편과 나를 거실바닥에 앉히더니 느닷없이 엎드려 큰절하는 게 아닌가. 이어 “오늘 시험 잘 보고 올게요.” 무뚝뚝한 한마디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다가, 차츰 웃음이 나오다가, 어느새 눈물이 났다. 이 녀석과의 동고동락한 시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몸이 약해 철마다 보약을 해 먹이면서도 `공부 그만 하고 일찍 자라.'는 말 한마디를 아꼈다. 나에게 부모라는 이름을 얻게 해 준 고마운 아이인데 한창 예민하고 중요한 시기에 작은 일탈이라도 보일라치면 미움과 사랑이 뒤섞여 늘 마음이 심산했다.

이맘때가 되면 늘 그날을 떠올린다. 나의 아이가 그러했듯 이 하루를 위해 전국의 고3 수험생들은 지난 한해 폭풍 같은 혹독한 시간을 견뎌냈을 것이다. 작은 말 한마디, 따뜻한 말 한마디가 꼭 필요한 시간이다. 수고했노라고, 더불어 너희가 걷고 있는 지금의 이 길이 앞으로 살아갈 인생길 전부가 아니기를 바란다고 말해 주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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