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공(陶工)의 삶을 품은 옥천 장찬리 백자가마터
도공(陶工)의 삶을 품은 옥천 장찬리 백자가마터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9.11.10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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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조선시대 중기(17~18세기)는 자기의 수요증가와 상업의 발전으로 백자 생산시설이 급속히 확산된 시기이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배경으로 조성된 조선 중기의 지방백자가마터는 전국적으로 300여 곳이 분포한다. 이 중 정밀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가마구조와 생산된 자기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가마터는 20여기에 불과한데, 이 중 하나가 옥천 장찬리 백자가마터이다. 옥천 장찬리 백자가마터는 장찬저수지의 둑 높이기 건설공사를 계기로 2011년 12월 조사하였다. 가마터는 옥천군 이원면 장찬리의 장찬저수지 끝 부분과 맞닿은 능선 끝자락에 위태롭게 있었다.
한겨울 찬바람이 저수지 수면을 지나 부딪치는 곳에 있는 가마터의 발굴조사는 조사에 쏟는 노동보다 찬바람과 눈보라를 버텨내기가 버거운 에너지 소모가 큰 조사였다. 조사를 위해 설치한 비닐하우스가 쌓인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반복되는 훼손과 매서운 찬바람을 맞으며 조사해야만 하는 어려운 조건이었다. 힘든 여건으로 조사인부들이 집단으로 조사를 거부하여 난처한 상황에 빠지기도 하였다. 매우 힘든 조사였다. 조선시대 도공(陶工)들의 삶의 터이며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한 가마 유구와 생산품인 백자의 모습을 쉽게 드러내 놓지 않으려는 듯하였다.
어렵게 드러낸 모습은 파괴된 백자가마터 1기와 상품가치가 없는 여러 종류의 백자들을 버린 폐기장 1기이었다. 가마는 파괴되었으나 길이 11.5m, 너비 1.1~2.4m, 깊이 20cm, 바닥면 기울기 20도 내외로 남아 있다. 가마의 평면형태는 배연부로 갈수록 점차 넓어지는 좁은 부채형이고, 연소실에서 번조실로 이어지는 얕은 불턱과 번조실 칸 사이에서 확인되는 불창기둥으로 보아 번조실 사이에 격벽을 설치한 분실요 구조이다. 장찬리 백자가마터에서는 성형한 그릇을 초벌구이 없이 건조 후 유약을 묻혀 바로 번조하였는데, 이는 그릇제작에 걸리는 시간을 줄이려는 방법으로 이해된다. 또 굽에 흙물을 묻혀 굵은모래가 쉽게 붙도록 하여 그릇 제작시간을 단축시켰다. 또한, 발, 대접, 접시 등 반상기는 여러 점을 포개구이하여 대량생산 방식으로 제작하였다. 이러한 제작방법은 조선 중기에 운영된 지방백자가마에서 많이 확인된다.
한편 출토된 백자 종류는 발·대접·접시·종지·잔 등의 반상기가 대부분이며, 병·호 등 특수용기는 매우 적다. 제기류(祭器類)가 없고, 갑발이 확인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급자기는 생산하지 않았다. 이 같은 유물 구성으로 볼 때 이곳 가마에서는 접시를 비롯해 비교적 질이 낮은 반상기 위주의 자기를 대량생산 하였다. 즉, 장찬리 백자가마는 이곳에서 대량생산된 자기가 신분이 높지 않은 계층을 주 수요대상으로 하는 민수용 백자가마의 특징을 보여준다.
장찬리 백자가마의 운영시기는 가마형태와 출토 자기의 특징 등으로 보아 조선 중기인 17세기 중~후반의 짧은 시간 동안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장찬리 백자가마가 운영되던 조선 중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황폐해진 국가경제의 재건에 힘쓴 시기로 농경지 복구, 생산인구의 확보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경작기술의 발달과 농업생산력의 증대, 대동법의 시행, 상품유통경제의 발전, 지방장시의 발달 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변화와 함께 증가한 백자수요에 맞춰 공급하기 위해 지방백자가마가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장찬리 백자가마터도 이 시기에 축조, 운영되었으며 주변지역에 민수용 자기를 공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옥천 장찬리 백자가마터는 조선 중기 지방백자가마로서는 옥천지역에서 처음 조사된 것으로 학술적 의미가 크나, 조선 중기 도공들의 삶의 흔적이 물속에 영원히 잠기게 됨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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