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년
풍년
  •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19.11.06 19: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상엿보기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올해는 풍년, 그러나 농민에게 풍년이 꼭 기쁜 일만은 아닌가 보다. 공급이 많으니 농산물 가격이 너무 낮다. 또 추석이 어느 때보다 빨랐기 때문에, 명절이 지난 후 한창 수확하는 사과는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 경매가가 많이 떨어졌다.
또 명절에는 큰 사과가 비싸지만, 평소에는 중간 크기의 상품이 더 좋은 값을 받기도 하는데, 이제 한창 건장한 청년 나무가 있는 부모님의 과수원에서는 아주 큰 알들이 많았다. 태풍을 대비해서 농작물 재해 보험에 가입해두었지만, 워낙 나뭇가지를 꼼꼼하게 고정하여 관리하였기 때문에, 여러 번의 태풍에도 떨어진 사과가 적었다. 다행한 일이었지만 막상 수확해보니 바람에 흔들리면서 나뭇가지에 긁히고 찍힌 것이 많아 상품성이 떨어지는 사과가 많이 나왔다. 차라리 낙과라면 보상이라도 받았을까? 이래저래 수확의 재미를 못 보신 부모님은 잠시 이런 생각도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9월 말, 한창 수확 중에 두 분이 동시에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아버지가 입원하신 후 혼자 사과를 따시던 엄마는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발가락 골절상을 입었다. 그동안 과수원 일은 오로지 두 분 몫이었기 때문에, 나도 남동생도 과수원 일은 잘 모른다. 수확할 일이 막막하였다. 탐스럽게 익어가는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모습이 모두 해야 할 일로 보여, 풍년이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농사일은 하루하루 때가 있다고 했는데, 다 익은 사과를 제때 따지 못할까 봐 부모님은 병원에서 밤잠을 설치셨을 것이다. 콩과 팥은 다 익어서 곧 깍지가 터져 알알이 밭에 나뒹굴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복이 고갱이가 생기고 있는 배추 안에 있는 벌레를 잡아주지 못해 하루하루 토실하게 살 오르는 초록빛 애벌레가 나방이 되기까지를 상상하며 김장 걱정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꼬박 한 달이 지났다. 어제 과수원에 갔더니 엊그제 퇴원하신 아버지와 엄마가 함께 부사를 따고 계셨다. 사과 중 가장 늦게 따는 품종이니, 이것만 수확하면 과수원의 일 년이 마무리된다. 아버지는 병원에서는 걷는 것조차 힘들다 하시더니, 퇴원하자마자 과수원으로 달려가셔서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사과도 따신다. 경운기 운전도 거뜬히 하는 걸 보니, 무리하지만 않으면 병원에 계신 것보다 오히려 회복에 도움이 될 듯도 하였다.
평균적으로 매해 3번 정도의 태풍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는데, 올해 우리나라에 영향을 준 것은 7개로, 유난히 태풍이 많은 해였다. 8월과 9월에 각각 3번씩의 태풍이 있었으니, 거의 매주 주말마다 태풍의 영향으로 바람이 세차거나 비가 오거나 했던 거였다.
우리 삶에도 유난히 태풍이 많은 해가 있는데, 올해 우리 집이 그랬다. 여느 해 같으면 나는 가을을 만끽하러 산과 계곡을 다니며, 이 좋은 계절에 왜 일만 하고 계시냐며 철없는 소리를 또 했을 것이다. 부모님의 수고도 알게 되었고, 갑자기 찾아온 어려움에도 크게 낙담하지 않고 극복한 우리 가족의 힘을 알게 되었다. 주변에 힘들 때 도와주는 분들이 많음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사과 한 알이 익기까지 농부들이 얼마나 수고하는지 그 수많은 순간을 아주 조금 알게 되었다. 다 익은 사과를 수확하는 일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손길, 힘든 과정이 필요한지 이제 조금 알게 되었다.
“농사지은 건데, 싸게 주세요.”, “농사지은 건데, 덤 주세요.”
농사짓기에 대해 쉽게 말하지 말아야겠다.
아주 큰 태풍이 지나간 뒤, 고개를 들어보니 그제야 앞산 뒷산에, 먼 곳에, 가까운 곳에 색색이 물든 단풍이 보인다. 그 아래 태풍을 이기고 알알이 영글어가는 황금빛 들판도 이제야 보인다. 풍년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