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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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19.11.05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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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하루라도 마시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고 오늘 할 일을 하지 못한 것 같아 찜찜하다. 터키의 속담 중에 이것은 지옥처럼 검고, 죽음처럼 강하며 사랑처럼 달콤하다(Coffee should be black as hell)고 했다. 아직은 제대로 이 맛을 잘 몰라서일까. 사랑처럼 달콤한지는 모르겠으나 깊은 쓴맛에 끌리는 것은 맞다.
비가 오거나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나는 넓은 거실 창을 때리는 그 소리와 풍경이 좋아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는 것을 즐긴다. 그때마다 내 손에는 따듯한 커피가 들려 있다. 대개는 아메리카노지만 어느 날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믹스 커피를 마시는 날도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천천히 음미하며 바라보다 보면 영화관에 온 듯도 하고 음악을 듣고 있는 듯도 하여 행복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커피처럼 묘한 맛을 내는 것도 없다. 커피의 원액인 에스프레소에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맛이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물을 넣으면 뒷맛이 깔끔하고 개운한 아메리카노가 되고, 우유로 거품을 내 올리면 부드러운 카푸치노가 된다. 그리고 달콤한 시럽을 함께 넣으면 달콤하고 부드러운 라떼가 만들어진다. 커피는 사람마다 맛의 취향이 달라서인지 그 종류도 많다. 그러다 보니 한 탁자에 앉아서 먹는 사람들의 커피가 다 제각각일 때가 많다. 카페처럼 친구와 약속장소를 잡기 좋은 곳도 이만한 데가 없다. 혼자도 좋고 둘, 혹은 더 여럿이 만나도 좋은 장소다. 내가 사는 이곳도 작은 읍내임에도 카페가 스무 집이 넘게 생겼다.
커피는 중독성이 강한 음료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쓴 커피는 마시지 못했다. 먼저 달콤한 믹스 커피로 시작했다. 그러다 점점 프림을 뺀 커피를 마셨고, 나중에는 설탕도 타지 않은 블랙커피를 숭늉처럼 옅게 마시다 지금처럼 진한 아메리카노를 즐기게 되었다. 커피가 왜 그리 좋으냐고 질문을 받아도 딱히 대답할 말도 없다. 매번 마시면서도 ‘좋다’라는 느낌은 있어도 ‘맛있다’라고 생각되는 것은 거의 없지 싶다. 다만 정말 좋은 사람과 마시는 순간은 ‘좋은’느낌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분위기 때문인지 몰라도 맛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커피는 사람과의 관계를 참 많이 닮은 듯도 하다. 우리는 하루하루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처음 내게로 다가온 사람들은 따뜻하고 정다우며 고맙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지는 시간이 말해 주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내 곁에 변함없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내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아메리카노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 사람들은 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어도 습관처럼 만나고 싶고 보고 싶게 만든다. 그래서 마음이 허하거나 위로가 필요한 날이면 서로를 찾아오고 찾아가기도 한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에 서로의 마음을 녹여 줄 수 있는 계절이다. 쌀쌀한 바람을 외투에 얹고 나를 찾아와 줄 지인이 있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달콤하진 않지만 울림을 주는 사람. 인생의 쓴맛을 담담하게 위로해줄 사람. 나는 또 기다린다. 짧은 문자 한 줄 보내 놓고.
“오늘 커피 한 잔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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