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의 비극
아파트의 비극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11.05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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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오래전의 일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케케묵은 옛날이야기는 아닙니다. 어느 작은 도시에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새롭게 지어졌습니다. 그곳엔 달동네며 판자촌 등 비탈진 도시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던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집단으로 옮겨 왔고, 새 아파트로 이사 온 영세민들은 꿈이 아니길 바랄 만큼 기쁨에 들떠 있었습니다.
공기업이 지은 이 아파트에는 가난한 사람들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익을 외면할 수 없던 공기업은 영세민 아파트보다 훨씬 넓은 평수의 일반 분양아파트를 길 건너에 지었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분양이 완료되었습니다. 도시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이 거대한 아파트 단지에 초등학교는 단 한 곳입니다. 문제는 거기에서 벌어집니다.
어느 날, 이 초등학교 한 교실에서 어느 여자 어린이가 돈을 잃어버립니다. 도둑맞았다는 그 여자아이의 주장에 따라 선생님은 같은 반 어린이 전원에게 눈을 감고 돈을 가져간 사람은 조용히 손을 들면 용서는 물론 없던 일로 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손을 든 어린이는 나타나지 않았고, 돈을 잃어버린 여자 아이는 짝꿍 남자 어린이를 의심합니다. 여자 아이는 일반 분양 아파트에 살고 있고, 남자 아이는 영세민 아파트에 삽니다. 의심의 근거가 잘 사는 집과 가난한 집의 자식이라는 차별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도둑으로 몰릴 처지에 놓인 남자 아이는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습니다. 처음에 몇 명에 불과했던 의심의 눈초리가 점점 반 전체로, 또 믿었던 선생님마저도 다를 바 없음을 느낀 어린아이는 끔찍한 사고를 치고 맙니다. 연필 깎는 칼로 소녀의 얼굴을 공격한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의 결백을 믿어주지 않고, 짝꿍인 여자아이는 의심의 차원을 넘어 노골적으로 도둑으로 몰고 가는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비극입니다. 가해자는 마음 깊은 곳에, 피해자는 얼굴에 깊은 흉터를 남긴 채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비극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 일어났던 일입니다.
아파트가 대다수 국민들의 주거 공간이 되고, 또 투기를 통해 부자가 되는 손쉬운 통로가 되면서 사람들은 그 아파트에 갇혀 사는 꼴이 되고 있음을 애써 외면하려 합니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수평보다 수직을 지향하는 아파트는 다분히 경쟁과 치솟음에 대한 욕망을 만들고 있음도 모른 척하려 합니다.
거기에 ‘우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은, 실은 자신의 의식 속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즉 ‘주관적인 나’의 의식 가운데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의 경영 컨설턴트 야마구치 슈의 베스트셀러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를 읽으며 기억나는 구절입니다. 그는 이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 자신에게 보이는 세상과 상대에게 보이는 세상은 크게 다를 수 있다. 그때 양자가 모두 자신의 세계관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으면 그 어긋난 차이가 해소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단언합니다.
쓸쓸한 11월 초입. 서울 성북구의 한 다세대주택에서 70대 어머니와 40대 딸 셋이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악취가 넘쳐 날 정도로 오랫동안 방치된 이들의 서러운 죽음 역시 ‘가난’이 원인이었습니다.
국가와 사회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도 아니고, 3개월 이상 공과금이 체납되면 관할 구청에 통보되는 시스템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사각지대가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고만 비극인데, 우리는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2014년 송파구 세모녀 자살사건의 비극을 여태 온전하게 떨쳐버리지 못한 세상에서 아파트이거나 다세대주택 같은 집단주거시설에 수용되듯 살고 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극도로 편 가르고, 얼씬도 못하게 하는 아파트공화국의 세태는 개선될 수 있을까요.
광주광역시의 어떤 영구임대 아파트 주민 10명 가운데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하고, 이중 25%가 실제 극단적인 시도를 했다는 조사결과가 서러운 2019년 늦가을.
대다수의 우리가 아파트에서 기어 나와 다시 기어들어가야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세상에, 가난과 상관없는 나뭇잎은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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