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된 ‘국민의 뜻’  
오도된 ‘국민의 뜻’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9.11.03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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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국민 73.2%는 국회의원을 늘리는 데 반대한다. 자유한국당이 자체적으로 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다. ‘현재 300석의 국회의원 정수를 10% 정도 확대하자’는 심상정 정의당 대표의 제안을 일축하면서 내놓은 수치다. 국민의 뜻이 이토록 명확한 데 무슨 헛소리냐는 반론이다. 한국당은 이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국민의 절대다수는 오래전부터 국회의원 증원에 꾸준히 반대해 왔다. 국회의원이 너무 많아서?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우리나라 국회의원 수는 외국에 비해 적은 편이다. 국민 10만명당 국회의원 수가 0.58명으로 OECD 국가 평균인 0.97명에 크게 뒤진다. 얼마 전 홍준표 전 한국당 대표가 인구 대비 국회의원 수가 0.16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적은 미국을 거론하며 국회의원 정수 확대에 반대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OECD에서 미국, 멕시코(0.49명), 일본(0.56명)에 이어 네 번째로 인구 대비 국회의원이 적은 국가다.
우리 유권자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 충분한 대표성을 누리지는 못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방에는 의원 1명이 커버하기 불가능한 광대한 선거구가 적지않다. 얼마 전 지역구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해 눈길을 끌었던 강원도 홍천·철원·화천·양구·인제 선거구는 무려 5개 지자체 유권자가 의원 1명의 대변을 받는다. 전국에서 가장 넓은 경북 영양·영덕·봉화·울진 선거구는 면적이 3755㎢로 국회의원을 49명이나 뽑는 서울(605.4㎢)보다 6배나 크다. 지역구 의원 얼굴은 믈론 이름도 모르는 유권자가 허다하다. 의원들 역시 지역을 꼼꼼히 챙기기 어렵다. 충북에서도 보은·옥천·영동·괴산 선거구는 진정한 대의정치를 기대하기 어려운 공룡 선거구로 꼽힌다.
사정이 이런데도 국회의원을 늘려달라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국회의원 증원에 반대하는 여론의 본질은 밥값 못하는 의원들을 늘려 세금을 축내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을 늘려야 할 필요성까지도 국회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혐오에 막혀 좌초했다고 볼 수 있다. 국회의원을 ‘필요악’정도로도 여기지 않는 치욕적인 여론을, 세금을 들여 굳이 확인하고 ‘국민의 뜻’으로 포장까지 한 후 기득권을 지키려는 주장에 동원하는 것은 낯두꺼운 자기기만이다.
지금 국회에서는 한국당을 제외한 나머지 4당이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비례 의석을 늘려 선거에서 표출된 민의를 결과에 보다 정확하게 반영하자는 취지다. 지난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은 정당지지율이 26.74%로 민주당의 25.54%를 앞섰지만 차지한 의석은 민주당(123석)의 3분의 1도 안 되는 38석에 불과했다. 개정안은 자금과 조직, 지역거점, 인재풀 등에서 밀려 비례의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군소정당의 입지를 키운다는 목적도 있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민주당과 한국당은 비례의석 배분에서 손해를 봐 지역구를 싹쓸이 하지 않는 한 의석이 줄어들 공산이 높다. 제3의 정치세력이 구축돼 한쪽이 제동을 걸면 국회 전체가 마비되는 거대 양당 지배구도를 완화하고 국회의 효율성을 높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현재 패스트 트랙에 올라 있는 개정안(준연동형 비례제)은 의원 정수 300석을 유지하면서 비례의석을 47석에서 75석으로 늘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례의석이 늘어나는 만큼 28개 지역구를 줄여야 한다. 현직 국회의원 28명의 정치생명이 달린 사안이다 보니 한국당은 물론 개정을 합의한 정당 내부에서도 반대가 만만찮다. 의원이 개별 투표하는 본회의 통과가 여의치 않다 보니 선거법 개정에 사활을 건 정의당에서 의원 정수를 30석 늘리고 지역구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고육책을 꺼내 든 것이다. 한국당은 자체 여론조사 결과까지 들이대며 반대하고 민주당도 동조하는 형국이다. 
많은 정치학자들은 이번 선거법 개정안이 거대 양당의 독과점 폐해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의원 증원이 무조건 기피되는 나라에서 이들의 기대는 물거품이 될 것 같다.

/권혁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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