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 풍경
백일장 풍경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19.10.3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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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반기문평화랜드 위로 가을하늘이 높다. 기념탑을 중앙에 두고 양옆으로 아담한 나무들이 울타리처럼 둘러 있고, 군데군데 벤치와 정자가 어우러져 제법 운치가 있다. 전국백일장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단상 앞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개회식을 하는 중이다. 유의사항 안내를 끝으로 드디어 고대하던 시간이 왔다. 마치 운동회 날, 청군 백군 팥 주머니를 던져 박이 터지면 꽃가루와 함께 펼쳐지던 ‘점심 잡수세요’처럼 오늘의 글제가 ‘짠’하고 나타났다. 글제를 확인하고 흩어지는 사람들의 표정이 다채롭다.
둘러보니 바람이 어지럽게 불어대는 통에 너도나도 원고지를 단단히 눌러놓느라 야단들이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세상 심각한 얼굴로 원고지를 노려보는 아이, 잔디밭에 자리를 깔고 엎드려 벌써 써 내려가는 아이도 보인다. 저마다 생각에 잠겼던 사람들도 시나브로 글쓰기 삼매경에 들었다. 바람도 살짝 잦아들 무렵, 이제 막 끄트머리부터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나무 밑에 커다란 돗자리를 펼치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한 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소풍을 나온 듯 아이스박스도 보인다. 간식 봉지를 들고 할머니는 손자에게 자꾸 먹으라고 한다. 앉은뱅이책상에 앉아서 글쓰기에 열중인 엄마, 억지로 불려 온 건지 후딱 시 한 편 써 놓고 큰아들은 그 옆에 길게 누웠다. 배를 깔고 엎드려서 집중하는 아빠와 낚시 의자에 묻혀 생각에 잠긴 할아버지까지 삼대가 모여 글을 쓰는 진귀한 풍경이다.
중학교 때였다. 국어 선생님이 불러서 교무실로 가니, 오늘부터 수업 끝나고 반공글짓기를 하나씩 쓰고 가라고 했다. 매일 뭐라고 썼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한가지 우산 그림의 반공 포스터를 보고 글을 썼던 게 생각난다. 사랑과 봉사, 협동, 안보, 국력 뭐 이런 것으로 우산살을 만들고, 그 위에 반공, 방첩이라는 방수천을 씌우면 북한 공산당의 어떤 침략도 막아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선생님은 좋다며 대회에서 어떤 제목이 나오더라도 꼭 그 내용을 넣어서 글을 쓰라고 했다. 대회 당일, 선생님을 따라 떨리는 마음으로 대회장으로 갔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대회가 취소됐다는 것이다. 자장면만 한 그릇 사 먹고 돌아왔다. 그렇게 무산된 첫 백일장 도전이 늘 아쉬웠었다. 그러나 수필공부를 막 시작하고서 문우들과 함께 참석했던 두 번째 백일장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제한된 시간 안에 주어진 제목으로 글을 쓴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내게 그런 능력은 없었다.
나는 오랜 시간 퇴고를 거듭해야 겨우 글 한 편을 완성하는 편이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게 좋다. 주제를 찾는 과정이랄까? 그렇게 고민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던 생각들이 단순하고 분명해지는 것이다. 깊은 성찰을 통해, 글뿐만 아니라 인생의 목표와 나아갈 방향까지 발견하게 되는 일, 오래 걸리면 어떤가. 그 매력 때문에 글을 쓰는 것 같다.
마감 시간이 임박해서 접수대로 한 초등학생의 엄마가 찾아왔다. “우리 애가 원고지를 잘못 써서 방금 다시 옮겨 쓰기 시작했는데...” 혹시 늦더라도 받아달라는 부탁이다. 아이에게 아쉬움이 남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알았으니 침착하게 다시 써오라고 했다. 다행히 모녀는 늦지 않게 원고를 제출하고 갔다. 행사는 잘 끝났다.
모녀에게 오늘 백일장은 어떤 경험이었을까? 입상은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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