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송암리 왜실 유적
충주 송암리 왜실 유적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9.10.2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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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충주 송암리 왜실 유적은 용당저수지 둑높임사업의 일환으로 2012년 조사된 유적이다. 용당저수지는 충주시 신니면 문승리에 있는 저수지로 용원저수지 또는 신덕저수지라고도 한다. 1949년 신니면, 주덕읍, 대소원면의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달천의 지류인 요도천(堯渡川)을 막아 만든 저수지이다. 만수면적이 82만㎡이고 40만㎡의 큰 규모의 낚시터가 조성되어 있어 낚시꾼들에게 인기가 높다.
이 저수지의 남쪽 도로변 마을이 송암리 왜실이며 이곳에서 저수지 쪽으로 돌출되어 뻗어내린 능선 끝자락에 왜실 유적이 자리한다. 옛 지도로 보면 충주-장호원-서울을 잇는 교통로 상에 위치하여 있고, 주변에 견학리 토성, 모도원지, 완오리유적, 장성리유적 등 신라~고려시대에 이르는 관방유적이 요도천과 교통로를 중심으로 5~7km 간격으로 분포된 것으로 보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 왕실원찰인 숭선사지와 원평리 사지, 선당리미륵불 등 고려시대 불교유적이 분포하고 있어 이 지역이 역사적, 지리적으로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짐작게 한다.    
송암리 왜실 유적은 후기 구석기시대의 2개 문화층과 통일신라시대의 환호(環濠), 수혈 유구로 이루어진 복합유적이다. 구석기시대 문화층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수렵도구인 슴베찌르개와 찍게, 긁개, 밀개, 자르게 등의 연모와 몸돌, 겪지, 돌날, 망치 등 석기제작관련 유물이 나왔다. 석기구성상 제작 관련유물이 높은 비율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생계유지를 위한 석기제작행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석기제작에 사용된 돌감은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석영맥암과 셰일, 혼펠스, 유문암, 사암 등 다양한 돌감을 사용하여 석기를 제작하였으며, 당시 옛 사람들은 돌감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돌감을 이용하여 석기를 제작하며 이곳에 처음 사람이 살았던 때는 33,000년 전(1문화층)이며, 그 후 20,000년 전(2문화층)에 다시 삶의 터전으로 삼았음을 고고학적 증거물이 답을 준다.
만년 이상의 시간을 뛰어넘어 2차레에 걸쳐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살며 문화흔적을 남긴 터에 통일신라 사람들이 삶을 이어갔다. 시간을 뛰어넘어 공간적으로 덧씌워진 듯하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유구는 환호와 수혈유구이다. 환호는 환구(環溝), 호구(濠溝)로도 불리며 일정 범위를 구획하여 다른 공간과 분리시켜 경계 지우는 방식 중의 하나로 도랑(溝)을 판 시설이다. 이 같은 환호는 농경생활로 안정적인 취락이 형성되고 취락 내의 집자리들이 구조적인 배치상을 띠게 되며 그 외곽을 구획하는 시설물로 등장하게 되는데, 동북아시아에서는 신석기시대에 등장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취락을 보호하려는 시설로 청동기시대에 출현하였다.
송암리 왜실 유적의 환호는 장방형 형태로 길이 70m, 너비 39m이고 내부공간은 2,100㎡이다. 북서, 북동, 남동쪽 모서리에 내부의 물을 빼기 위한 도랑을 설치한 점이 특이하다. 환호 내부에는 다양한 형태의 수혈유구 31기가 분포되며, 태릉지인(泰陵之印)명 청동도장과 청동발, 쇠손칼, 쇠낫, 자물쇠, 사면편병, 주름무늬병, 기와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환호의 조성 및 운영시기는 9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이곳 환호는 규모와 입지, 내부 시설물 등으로 볼 때 방어목적의 시설이라기보다는 교통로 상에 위치하여 물자의 저장과 운송을 위한 보호목적으로 시설된 것으로 판단된다.
구석기시대 옛 사람들의 삶터였고, 통일신라시대 무역의 중심지였던 이곳에 오늘날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의 여유로운 삶이 이어지고 있으나 토목공사로 또 하나의 유적이 사라지는 아픔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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