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부터 확실하게 하자
진단부터 확실하게 하자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9.10.27 1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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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아이와 특별한 추억을 쌓고 싶었다“. 미성년인 자녀를 자신의 논문 공저자로 올린 어느 대학교수가 했다는 말이다. 자식의 스팩을 쌓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식과의 추억을 쌓고 싶어서였다는 이 낭만적 변명은 윤리가 바닥을 드러낸 학계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자식과 쌓은 뜻깊은 추억’은 성실하게 미래를 준비해온 남의 집 자식의 기회를 빼앗는 패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황당한 변명에서는 불공정에 대한 인식도, 더티 플레이에 대한 부끄러움도 보이지 않는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학자적 양심이 확인될 뿐이다. 
최근 교육부가 서울대 등 45개 대학을 조사한 결과 미성년자가 저자로 등재된 245건의 논문이 적발됐다. 조국 전 장관의 딸이 고교시절 제1 저자로 등재했던 논문도 들어 있다. 지난해 적발한 549건까지 포함하면 미성년 공저자 논문은 총 794건에 달한다. 교육부는 7개 대학에서 부정 판정을 받은 논문이 적발돼 11명의 교원에 대해 징계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얄팍한 징계 폭을 보면 발견된 논문의 미성년자 등재가 대부분 부정한 방식으로 이뤄지지는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석·박사 논문에 피를 말리는 대학원생들만 봐도 연구논문 저술이 얼마나 고되고 치열한 작업인지 짐작할 수 있다. 대학논문에 이름을 올리고 국내외 학술지를 주름잡은 수백명의 중·고생들은 가히 천재 중의 천재라고 할 수 있다. 평화상 빼고는 아직까지 노벨상 수상자를 내지 못한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지는 대목이다. 학계에서는 지금 드러난 미성년자 논문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도 나돈다. 전국의 모든 대학으로 조사를 확대하고, 저자로 (미성년자 여부 기록 없이) 이름만 등재한 사례를 살펴보고, 해외 학술지까지 털면 규모가 훨씬 커질 것이라고 한다.
유은혜 교육부 장관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끝까지 검증하고 각 대학 연구자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교육강국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국제적으로 망신살 뻗칠 치욕적인 일이지만, 발본색원하겠다는 장관의 약속은 준수돼야 한다. 매년 하기로 한 미성년 공저자 논문 실태 점검은 대상을 확대하고 교원 징계시효도 늘려야 한다. 현행 법령상 교원 징계시효는 3년에 불과하다. 연구 부정행위가 적발돼도 시효에 묶여 징계를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국회에서는 국회의원 등 고위 공직자 자녀의 대입전형 전수조사를 추진하고 있다. 민주당이 불을 댕기자 한국당, 바른미래당, 정의당 등도 잇달아 특별법을 발의하거나 발의를 공언하고 나섰다. 대상도 국회의원에서 시작돼 고위 공무원까지로 늘려가는 분위기다. 교육 불공정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헤아린 여·야당의 일치된 행보가 대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의구심도 든다. 자기들 허물 여부나 제대로 살폈으면 좋겠는데, 다른 공직자들로 판을 키우는 모습이 국민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결과에 대한 비판을 희석하려는 의도는 아닌지 수상스럽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2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27번이나 ‘공정’을 언급했다. 조국 사태에서 발화한 국민의 실망과 분노를 연설에 반영했을 것이다. 대통령은 “국민이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이 교육 불공정”이라고 했지만 해법으로 내놓은 것은 ‘정시 비중 상향을 골자로 한 입시제도 개편’이었다.
사회적 불신을 해소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철저한 진단과 엄정한 처방이다. 대통령은 처방부터 내렸다. 처방은 질병의 특성과 증세의 정도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최근 불공정이 이 나라에서 절대적 화두가 된 후 20대가 진보 정권에 등을 돌리고, 그나마 여당에서 이성적 의정활동을 한다는 평가를 받던 의원들이 잇달아 정치 포기를 선언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처방은 이런 처절한 자기 진단을 토대로 이뤄져야 한다. 대학교수와 국회의원이 누려온 부당한 특권을 낱낱이 파헤치는 냉정한 진단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병을 고칠 처방을 얻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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