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사회, 지금 그대는
고령화 사회, 지금 그대는
  • 전영순 문학평론가·칼럼니스트
  • 승인 2019.10.24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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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전영순 문학평론가·칼럼니스트
전영순 문학평론가·칼럼니스트

 

단풍이 참 고운 날이다. 하루가 다르게 찬란한 빛깔을 연출하는 세상을 보면 왠지 모르게 숙연해진다. 자연이 주는 환희 속에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밟힌다. 머잖아 후두두 떨어져 뒹굴 낙엽이 단풍 위에 얹혀 어제와 오늘 내일을 달고 나부낀다. 아무리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고 해도 저 빛깔 그대로 단풍을 영원히 눈부시게 할 수 없다. 생명이 있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따라 흘러가야 아름답다.

요즘 자연생태계는 약육강식에 따라 동물군의 개체 수가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의 발달로 린네의 종의 학명 분류가 질서를 흔들고 있다. 과학기술의 주범인 인간은 식(食)문화와 의술, 생활환경의 질적 향상으로 노년기를 연장해 고령화 사회를 초래했다. 저출산과 맞물러 곧 도래될 초고령화 사회는 과학 문명의 횡포인가? 자연현상인가?

노년기의 연장은 인생 여로에서 연령층 프레임의 비율을 바꿔놓았다. 몽테뉴가 인간의 지복(至福)은 행복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살기 to live', `잘 살기 to live well', `더 잘 살기 to live better'에서 `잘 죽기 well die'시대를 맞았다. 기술의 발달로 잘 먹고 잘살게 되었는데 문제는 생산성 없는 노년기가 너무 길다는 것이다.

1900년까지만 하더라도 기대수명이 30세였던 한국이 2000년대 전체인구의 65세 이상 고령층이 전체인구의 7%를 차지하면서 이미 우리가 기대했던 수명의 지수를 넘어섰다. 2050년이 되면 초고령화 사회를 맞아 기대수명이 100세에서 120세로 증가한다고 한다. 고령화 사회를 맞아 남은 생을 어떻게 살다가 죽느냐가 문제이다. 현대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질병과 죽음이 동반하는 노년기는 피해갈 수 없다.

2015년 OECD에서 한국 노년층의 빈곤이 전체 1위를 차지했다고 하니 기성세대들은 정신 바짝 차려서 노후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늙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노년기의 우리 몸은 생물학적으로 쇠약과 노화 등으로 퇴화한다. 의술의 발달로 `동안, 회춘 모델, 재활성화'같은 성형 프로젝트로 노화를 은폐해 젊어 보이고 싶겠지만, 기억력 감퇴와 노화되는 육신은 막을 수 없다. 몽테뉴는 서른 살 이후 정신과 육체가 퇴보만 거듭해 왔으며, 마흔부터 “노년의 길”로 접어들기 때문에 늙어서 죽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면 어리석고 비생산적인 자존심에 빠지고 따분한 수다나 떨고, 사소한 일에 걸핏하면 성을 내고, 비사교적으로 변하고, 미신에 사로잡히고, 아무 쓸모없는 부(富)에 걱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 듦의 가치는 이러한 결함을 바로잡는 데 있다. 이제는 자식들에게 의존하는 시대는 지났다.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 의술에 의존하며 영혼 없는 좀비로 오래 살면 좋은가? 어쩌다 요양원에 가면 꺼무칙칙한 피부에 산송장처럼 산소호흡기를 달고 몇 년째 누워 있는 것을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짧게 살더라도 인간답게 살다가 가자.

나이 들어서 아직도 고집이나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챙기려고 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는다. 나이 든다는 것은 지혜가 무르익어 젊은이들이 본받을 수 있도록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오래 살아야 인생 100년이다. 개똥철학으로 영양가 없이 입만 자꾸 열지 말고 주머니를 부지런히 열어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줘라. 그러면 당신은 단풍보다 더 아름다운 날을 맞이할 것이다. 샘 해리스는 인간의 지고의 가치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행복을 최대화하는 것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대여! 자연도 당신의 행복을 위해 햇살을 뒤적이며 곱게 물들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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