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를 생각한다
안중근의사를 생각한다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9.10.24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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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10월 26일 하면 떠오르는 사건 2개가 있다. 그 중 하나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이다. 1979년 10월 유신독재 타파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부산마산사태(부마민주항쟁)'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상황에서 유신독재로 정권을 이어가던 박정희 대통령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가 저격한 사건이다.

또 하나의 사건은 박정희 저격사건 꼭 70년 전 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일본의 영웅인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안중근 의거라고 한다. 지금도 하얼빈 역에는 기념관과 함께 안 의사가 권총으로 이토를 겨냥하고 저격했던 장소를 표시하여 그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민족의 원수를 통쾌하게 처단한 이 의거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안 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저격 사건이 일어난 30년 후인 1939년 10월 16일에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안중근 의사의 아들인 안준생이 일본 이토히로부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남산의 박문사라는 절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인 이토히로쿠니에게 사죄를 한 것이다.

“아버지를 용서하소서!”일본 신문들은 일제히 “테러리스트 안중근의 아들이 아비를 대신하여 용서를 구했다!”라면서 대서특필했다. 한국은 테러를 저지른 살인자의 국가이고, 일본은 그 테러를 용서한 자비로운 국가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안준생은 `창씨개명'과 `내선일체'를 시행한 역사상 가장 악독한 조선 총독 미나미지로의 양아들이 된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김구 선생은 나라를 팔고 아비를 판 더러운 변절자를 처형해야 한다고 분개했다. 뜻있는 모든 민족의 지도자들은 이 사건을 호랑이 같은 아비에 개만도 못한 자식이 태어났다고 안준생을 비난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협하는 침략의 원흉인 이토를 처단한 세계사적인 영웅이 안중근의사인데, 어떻게 안준생과 같은 아들이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힐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은 간악한 일제가 각본 연출한 연극이었다. 여기에는 일본의 더러운 계략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간수였던 헌병 치바도시치는 안 의사의 대의명분과 동양평화에 관한 철학을 알게 되면서 안 의사에 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갖게 됐다고 한다. 안 의사의 청빈하면서도 절제된 옥중 생활과 사형 선고에도 꺾이지 않는 의연한 지조와 인간적인 품위에 깊은 존경심과 경외심을 느끼게 된 것이다. 치바는 안 의사 사형 집행 후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 미야기현 센다이로 돌아온 후 집안에 제단을 만들고 안 의사의 초상화와 위패와 필묵을 모셔 놓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제를 올렸다는 사실은 지금도 많은 사람에 의해 회자되고 있다.

안중근 의사로 인해 민족정신과 자긍심이 타오르는 상황에서 일제는 안 의사의 아들을 변절자로 만들어 한국의 자존감을 꺾어 버린 것이다. 안 의사의 큰아들은 7살 때 누군가가 준 과자를 먹고 독살됐는데, 둘째 아들 안준생 역시 끝없는 협박과 회유 속에 살기 위해서 아버지와 조국을 배신하고, 더러운 생명을 구걸하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러한 안준생의 더러운 변절과 치욕적인 모습에도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업적은 폄하되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의 간악한 계략과 더러운 속임수에 더더욱 분개할 뿐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의 수레바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작금의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단재 선생의 추상같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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