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세상을 흔들어도
가을바람이 세상을 흔들어도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19.10.22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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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조선의 반 고흐 최북”

내가 최북이란 사내를 알게 된 것은 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웹서핑을 하다 우연히 보게 된 글의 제목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는 광기의 화가로 대표 될 만큼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화가이다. 최북 또한 그 행적이 기이함에도 우리에게는 생소하기만 하다. 최북은 고흐보다 100여년을 앞서 살다 간 인물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서양문화에 더 익숙하다. 그 때문인지 주위에서 보면 서양화를 그리는 것은 보았어도, 동양화나 수묵화를 그리는 사람은 드물다.

거기재, 그의 호처럼 그는 언제나 항상 거기에 있었다. 세상 어디든 모두 그의 자리였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가 싫어 산속에 들어가 그림을 그릴 때면 그는 이내 자연이 되어 있었고, 먹이를 쪼는 메추라기가 보이면 또다시 그는 한 마리의 메추라기가 되어 버린다. 세상의 북이고자 한 사람, 하지만 결코 북이 되지 못한 사람, 그가 바로 조선의 외눈박이 화가 최북이다.

최북이란 사내에게 삶은 고해였다. 술이 아니면 세상을 잊을 수가 없었다. 술을 마시고 나서야 세상 밖으로 나설 수도 볼 수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엔 한쪽으로 보고 싶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한쪽으로 보는 세상이야말로 온전한 세상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날, 그에게 권세가가 그림을 부탁해 왔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는 성미였다. 거들먹거리는 양반이 싫었던지 단칼에 거절했다. 양반은 그에게 협박하며 그림을 얻으려 했다. 그러자 최북은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리는구나.”라고 말하며 송곳으로 자신의 한쪽 눈을 찌르고 만다.

최북은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중인이라는 신분이었음에도 뛰어난 그림으로 양반과 이 세상에 당당하게 맞섰다. 최북은 김명국 장승업과 함께 조선 3대 기인화가로 꼽힌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생소한 이유는 그가 권세 있는 양반도 아니었고, 국가에 소속된 화원도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북 미술관”을 찾은 적이 있었다. 최북은 산수화와 메추라기 그림을 잘 그린 화가이다. 그런데 그가 그렸다고는 믿기지 않을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고사시화”

그림 속에 있는 선비는 최북 자신일까. 왜소한 체구의 한 선비가 빈방에서 앉은뱅이책상을 앞에 놓고 앉아 있다. 그림을 그리려는 것일까. 책상 위에는 종이만 있을 뿐이다. 지두화를 잘 그리기로 소문난 그다. 손에는 먹물이 묻은 듯도 하다. 아니면 가을날 누군가에게 서안이라도 보내고 싶은 것일까. 상념에 젖은 모습은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가을바람이 부는 탓일 게다. 활짝 열어 놓은 방문 위로 나뭇가지가 늘어져 있다. 방안을 엿보는 듯도 하고, 방안의 주인과 이야기라도 나누는 듯도 보인다.

최북은 다혈질에 주광으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듯 고요하게 앉아 상념에 젖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기이하기만 하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광인으로 취급받았던 그도 내면에는 선비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참을 그 모습에 취해 바라봐서일까. 그림 속의 나뭇가지가 가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탕건을 쓴 선비가 나를 향해 빙긋이 웃어주는 것이 아닌가. 최북, 먹 향기를 좋아하고, 사람을 그리워한 사람. 하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예속되기를 거부한 진정한 방외인이자 자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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