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
실종
  • 신금철 수필가
  • 승인 2019.10.22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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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금철 수필가
신금철 수필가

 

마음이 고향집으로 향한다. 빗장을 걸었던 사립문을 연다. 고추장을 담은 장독대 위 대나무 채반 위엔 빨간 고추가 널리고, 배를 드러낸 누런 호박이 햇볕을 쬐며 담벼락에 누워 있다. 하얗게 펼쳐진 메밀밭 위로 떼구름이 유유히 흐르는 들판을 지나 비바람을 이겨내고 노란 고갱이를 품은 배추밭도 지난다. 메뚜기가 후드득 날아 앉은 배추포기에 고사리 손이 얹혀 있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어릴 적 기억이다.

가을 햇살이 내려앉은 오후, 주문하여 담가놓은 고추장을 찾고 시장에 들러 고등어가게를 기웃거렸다. 싱싱한 고등어 고르는 법을 아는 체하니 생선가게 주인은 이리저리 들추며 고등어를 보여주었다. 남편에게 현명한 주부의 점수를 받고 싶은 허세였을 게다. 미끈한 무를 하나 사며 생채를 하여 조금 전에 산 고추장을 듬뿍 넣고 밥을 비벼먹을 생각을 하니 군침이 돌았다. 비틀어도 구김 안 가는 꽃무늬 바지도 사서 기분이 더욱 좋았다. 많은 돈을 쓰지 않고도 양손에 잔뜩 들린 올망졸망한 비닐봉지에 행복도 함께 들고 다녔다. 낯선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고 사람냄새를 맡으며 인정이 오가는 시끌벅적한 시장을 누비는 즐거움이 쏠쏠하였다.

나들이를 마치고 해거름에 집으로 돌아왔다. 시장바구니를 펼치며 알뜰하게 시장을 보았다는 흐뭇함도 느꼈다.

실종 사건이다. 고추장을 담은 봉지가 보이지 않는다.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남편에게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고추장이 보이지 않는단다. 분명히 차의 뒷좌석에 실은 것 같은데….

기억을 더듬어 올라간다. 또렷하지 않다. 아마도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오르기 전에 팔이 아파 잠시 쉬는 동안 차의 뒷문에 고추장을 두고 앞문으로 탄 것 같다. 정신이 번쩍 들어서 받아온 명함을 들고 고추장 공장에 전화하였다. 그러나 두고 간 고추장이 없단다. 이럴 수가! 고추장을 가지러 간 사람이 그것을 두고 왔단 말인가? 허탈하였다. 고추장 생각은 까마득히 내려놓고 시장을 휩쓴 생각을 하니 헛웃음이 났다.

밤새 잠을 못 이루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한두 차례 물건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지만, 이번처럼 어이없게 산 물건을 두고 오거나 기억을 밖에 두고 다닌 적이 없었다. 몇 달은 족히 먹을 고추장이 아깝기도 했지만 어이없는 짓을 한 정신의 실종이 걱정스러워 잠시 심각해졌다.

행여 날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을 것 같아 아침에 다시 주인에게 확인했다. 이미 내가 잃어버린 고추장은 다른 집의 주방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 차가 떠난 후에 누군가 검정봉지를 들고 가더라는 것이다. 태연하게 들고 가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단다. 속이 상했지만 더 이상 고추장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지자 포기를 하였다.

고추장을 들고 간 사람도 자기 것이 아니면 다른 사람의 물건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내 정신의 실종보다 태연하게 남의 물건을 가져간 그 사람의 양심 실종이 더 심각하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미련을 떨쳐냈다. 앞으로 잦아질 내 정신의 실종을 단단히 단속해야겠다는 각오도 새롭게 하였다.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이다. 양심의 실종으로 인한 크고 작은 사건이 늘어나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길바닥에 놓여 있는 물건을 주워 간 게 그리 큰 잘못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자신의 양심을 버리고 내 욕심을 채우는 삶의 규범과 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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