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범태
정범태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19.10.21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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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를 말하다
정인영 사진가
정인영 사진가

 

“잔머리 굴리지 말고 사진을 찍어야 역사와 사회가 바뀝니다.”
보도사진가 정범태는 신문사 사진기자로 있으면서 늘 마음속에 다짐해 둔 생각을 말했다. 1928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상선에서 일하고 공부하다 광복이 된 직후 돌아왔다.
일본에 있을 당시 외삼촌이 일제 카메라를 선물로 사준 것을 계기로 사진 인생의 길에 들어섰다.
6·25 전쟁의 소용돌이에 피난을 가면서도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당시 육군 공병대 문관으로 일한 그는 1956년 조선일보 사진기자로 입사해 40여 년 동안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는 취재현장에서 늘 목숨을 걸고 셔터를 눌렀다.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 찍었다”는 그는 1960년 장기집권에 눈이 먼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이는 고려대 학생들이 정치 깡패들에게 무차별 폭행당하는 현장을 찍어 보도하면서 4.19혁명에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오늘날에도 ‘결정적 한 컷’으로 회자하는 특종사진이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 경기고등군법 재판소에서 고개를 숙인 여죄수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있는 흑백사진은 일본 아사히 신문 국제사진살롱 10선에 뽑혀 보도사진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격동의 현장 외에도 사건취재에도 근성을 발휘했다. 1960년 명절을 쇠려고 고향을 가려는 사람들이 서울역에 몰리면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슬픈 특종으로 유명해졌다. 1962년 강화도 전등사에서 깡패들의 행패에 못 이겨 관광객들이 쫓겨나는 사진이 보도돼 국가위신손상협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1년 동안 교도소에서 복역하기도 했다. 1981년 이후 10여 년 동안은 한국 전통춤꾼을 주로 찍었다. 그리고 2006년 사진 인생 50년을 회고하는 개인전을 열어 그간의 궤적을 보여주었다.
보도사진을 기자의 눈에 들어오는 사건·사고와 정치현장에서 무엇이건 있는 그대로 담아내 보도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다. 또 사진에 미적 가치와 휴머니즘이 담길 때 사진가로의 능력을 인정받는다. 그의 사진은 이러한 확고한 신념을 매개로 역사의 증언자가 되었다.
그러한 시각적 천재로서 보도사진가는 자신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현장에 뛰어들어 한 장의 귀중한 사진을 찍는 것이야말로 사진가의 자질과 자격을 가름하는 기준이 된다. 우리나라 사진가 중에서 특히 보도사진가는 광복 후 지금까지 수많은 현장에서 위험성을 감수하며 찍은 기록들이다.
1945년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나 정리되지 않은 친일파들의 행동과 이념의 소용돌이, 전쟁의 비극, 자유당정권의 썩은 정치로 말미암은 비참한 사회, 군사쿠데타와 광주민주화 운동 등 열거할 수조차 없는 사건 앞에 보도사진가들의 열정이 기록이란 결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하는 세월을 몸바쳐 카메라에 담아온 그의 정신은 그가 찍은 사진들을 통해 이 땅의 역사현장기록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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