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전벽해가 느껴지는, 청주 낙건정(樂健亭)
상전벽해가 느껴지는, 청주 낙건정(樂健亭)
  • 김형래 강동대 교수
  • 승인 2019.10.2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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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김형래 강동대 교수
김형래 강동대 교수

 

오송읍은 본래 청주시의 서쪽 미호천 강 바깥쪽이 되므로 서강외 일하면(西江外 一下面)이라 하였다. 읍의 북부지역에는 잔구성(殘丘性) 산지가 다소 발달되어 있으나, 기타 지역은 낮은 평지로 충청북도 최대의 곡창지대인 미호평야의 중심부를 이룬다. 평야 남단부를 흐르는 미호천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병천천(竝川川), 서쪽으로 조천(鳥川)이 흘러 관개에 유리하다.

그러나 현재의 오송읍은 오송생명과학단지와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과 같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읍의 중앙부에 위치하는 연제리(蓮堤里)는 본래 청주군 서강외 일상면(淸州郡 西江外 一上面)의 지역으로서, 돌다리 못이라는 연못이 있으므로 연못골 또는 연제동이라 하였으며 모과나무가 있어 모과동(木瓜洞) 속칭 모가울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낙건정(健亭)은 돌다리 못 남쪽의 쇠대배기산이라 불리는 낮은 언덕 위에 북동향하여 있다. 이곳에서는 넓은 지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 정자의 입지로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젠 그 많은 농경지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수천 세대의 아파트가 그 풍광을 대신하고 있다.

낙건정은 조선후기에 송시열, 송준길, 박정해, 박정용 등이 시사(詩社)로 조직하였던 백련사(白蓮社)와 관련이 있다. 낙건정에서 북서쪽으로 약 1km 떨어진 낮은 언덕에 약정(約亭)이라는 정자터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송시열(宋時烈) 등 당대의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공동의 규약을 정하며 미풍양속을 실현하였다.

그 후 고종 때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등 정변을 겪은 후 이 지역 유지 45인이 모여 백련사(白蓮社)의 상부상조(相扶相助)와 예속상교(禮俗相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난국계(菊契)를 조직하고 그 모임의 장소로 낙건정을 건립하였다.

정자의 이름은 난국계 결성 시에는 난국정(菊亭)이라 하였고, 1926년에 퇴락한 정자를 박준학(朴準學), 박영래(朴泳來) 등 기노회원(耆會員) 45명이 다시 세우면서 낙건정(健亭)이라 하였다. 젊고 건강할 때 은거해 삶을 즐기라는 뜻을 품고 있다. 아마도 송나라 때 대학자이자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구양수(歐陽修, 1007~1072)의 `은거를 생각하는 시'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된다. `몸이 건강해야 비로소 즐거워지니, 늙고 병들어 부축하기를 기다리지 말라'는 것이 그 본래의 시구다.

현재의 낙건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내부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마루에는 계자난간을 설치하였다. 정면 남쪽칸에 정자로 오르는 화강석계단을 설치하였다. 주위로 높게 담장을 둘러 현재는 개방감 있는 정자의 모습을 찾기 어려워졌다.

도시개발로 인해 역사적 문화환경이 훼손되거나 파괴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건축은 역사성과 장소성이 중요한 환경요소인 만큼 이러한 역사적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한 개의 점으로서 문화재를 취급할 것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도록 도시의 문화환경으로 취급해야 한다.

넓은 농경지는 개발로 인해 신도시로 변했지만, 그나마 인근의 돌다리 못을 포함하여 주변을 연계한 오송호수공원이 조성되어 지역의 정체성이 보존되고 있는 것은 다행으로 여겨진다.

낙건정은 최근 택지개발로 인하여 입지의 원형은 완전히 변해버렸으나, 선조들의 상부상조와 예속상교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모임인 `난국계(菊契)'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오래도록 여러 성씨의 문중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며 미풍양속을 이어가는 정자는 거의 없다. 지역 화합의 구심점으로서 오래도록 그 전통이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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