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전 원불교 청주상당교당 교무
  • 승인 2019.10.17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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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박경전 원불교 청주상당교당 교무
박경전 원불교 청주상당교당 교무

 

하루를 지내고 나면 저녁에 휴식시간을 갖는다. 5일의 직장생활을 하고 나면 2일의 휴식시간을 갖는다. 휴식은 `쉼'이다. 움직이고 사용했으니 쉬어주는 것이다. 우리는 `쉼'을 생각할 때에 당연한 듯이 육체를 먼저 떠올린다. 육체가 피로함을 느끼면 `쉼'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다. 나에게 물어본다. 나는 잘 쉬고 있는가?

쉰다는 것은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휴일에 산과 바다로 놀러 갔다 와도 피곤하니 쉬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휴일을 활용하여 여가를 즐겼지만 휴식을 취하진 못했다는 뜻이다. 좋은 산과 바다를 보았지만 그것을 보기 위해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흔히 잠을 잘 때 쉰다고 말하곤 한다. 쉬는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고 과도한 시간의 노동을 요구하면 사람들은 병이 나게 되고, 작업 중 큰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에 법으로도 휴식시간을 정하고 있다. 법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육체의 휴식을 적극적으로 취하려 한다.`농땡이'라는 말도 사람들의 쉼에 대한 본능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행태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들은 잘 쉬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육체의 피로를 쉬어주는 것은 적극적으로 생각하지만 정신의 피로를 쉬어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육체와 마찬가지로 정신 역시 휴식이 필요하다. 정신도 쉬어야 한다. 육체가 움직이는 것이 노동이듯이, 정신도 움직이는 것이 노동이다. 정신이 움직인다는 건 우리의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가 잠을 잘 때 쉬어주는 것처럼, 정신도 잠을 잘 때 쉬어주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맞다. 그러나 틀리기도 하다. 잠을 잘 때 우리는 꿈을 꾼다.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없다. 대뇌활동이 잦아드는 깊은 수면 시간을 `논렘 수면'이라 하는데 이때에도 완벽하게 꿈을 꾸지 않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어도 기억을 못 할 뿐이라고 한다. 어쨌든 우리가 잠을 잘 때 꿈도 꾸지 않고 정신을 쉬어주는 시간은 대부분 1시간에서 2시간 사이라고 한다.

육체의 예를 들어보자. 2시간만 쉬어주고 22시간을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며칠간, 혹은 몇 달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병이 날 것이다.

지금은 정신을 쉬어주기 더 힘든 시대다. 우리가 쉬는 시간이라 말하는 시간에도 정신은 끊임없이 소진되고 있다. 인터넷의 발달은 우리에게 심심할 틈을 주지 않는다. 스마트폰의 발달은 한순간도 우리에게서 인터넷을 떠나게 하지 않는다. 게임 중독이 위험한 건 정신의 쉬는 시간을 치명적으로 줄여 놓기 때문이다.

원불교의 개교 표어는`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이다. 물질의 발달은 모두가 알다시피 무서울 정도이며, 앞으로 얼마나 더 빨리 더 편리하게 발전할지 모른다. 그런데 그 물질을 사용하여야 하는 사람의 정신은 어떠한가? 더 좋은 스마트폰과 더 좋은 자동차, 더 좋은 첨단 장비를 사기 위해 우리는 빚을 지고 그 빚을 갚기 위한 노예생활을 자처한다.

정신을 개벽하기 위해선 정신이 건강하여야 한다. 휴식 없이 건강은 없다. 쉬지 않는 정신은 건강할 수 없다.

정신을 쉬어준다는 것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다. 좋은 생각, 나쁜 생각 모두 정신의 활동이다. 그 모든 생각들을 놓고 아무런 생각도 없는 고요하고 평온한 그 상태가 정신의 `쉼'이다. 사회에서 말하는 명상이나 원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이 바로 정신의 `쉼'이다.

명상을 하자. 선(禪)을 하자. 정신을 쉬어 주자.

마침, 원불교 청주교당에서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시민에게 무료로 `청주시민을 위한 선·명상 모임'을 연다고 한다. 정신을 쉬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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