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짓기
이름 짓기
  • 김규섭 청주시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19.10.1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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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규섭 청주시 문화산업팀장
김규섭 청주시 문화산업팀장

 

첫째 아이를 가졌을 때의 일이다. 손자를 본다는 기쁨 때문이었을까, 아버지께서는 아이도 낳기 전에 이름을 지어 오셨다. 이른바 태명이었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가족들을 모아놓고 품속 깊은 곳에서 지어오신 이름을 꺼내셨다. 그리고 엄숙하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저 아이 이름은 항우여. 김항우.” 항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아닌가. 초한지에 나오는 그 항우. 한나라 유방에게 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사람.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항우장사처럼 호기 있게 자라라고 수양어머니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날 이후 우리 가족은 뱃속의 아이를 항우라고 불렀다.

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께서는 항우라는 이름이 좋다며 호적에 올리자고 하셨다. 항우! 역사 속에서는 호걸이었지만 중국 사람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 왠지 내키지 않았다. 하루는 아버지께 “이름은 한번 지으면 오래도록 불러야 하니 본관의 항렬을 따라서 지으면 어떻겠냐.”고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께서는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그리고 며칠 후 이름 하나를 받아오셨다. 둥글원(圓)자에 돌림자 녹일용(鎔), 큰아이의 이름은 김원용이 되었다. 평소 다니던 절의 큰스님께서 지어주셨단다. 보름달처럼 둥글게 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했다.

이듬해 둘째가 태어났다. 딸이었다. 이번에도 아버지께서 이름을 지어오셨다. 은례(恩禮)였다. 발음도 어렵지만 왠지 세련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내가 이름을 지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출생신고를 하는 날, 아침 일찍 옥편을 들고 집을 나섰다. 딸의 이름만큼은 예쁘고 부르기 쉽게 지어주고 싶었다. 돌림자는 쓰지 않기로 했다. 면사무소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옥편을 넘기며 차례로 한자를 써내려갔다.

한참을 써 내려가다 보니 泰(편안할 태)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다는 뜻을 가진 사자성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의 두 번째 글자가 바로 `편안할 태'아니던가. 이 글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콩닥거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다음 찾은 글자는 連(이을 연)자였다.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나간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세상, 마음과 마음을 열어주는 세상,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그런 세상을 우리는 얼마나 갈망했던가. 한자를 조합해 보니 김태연이었다, 읽기가 쉽고 자연스러운 것 같아서 좋았다. 출생신고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조용히 눈을 감고 이렇게 빌었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너의 이름은 김태연이란다. 이름을 짓다 보니 수많은 부모가 소망을 담아서 자식의 이름을 짓는다는 걸 알았다. 너의 이름 속에는 아빠의 꿈이 담겨 있단다. 이름에 긍지를 가졌으면 좋겠다.” 차창밖에는 설핏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2005년도였던가. 개인의 이름을 바꾸는 것도 행복추구권에 속한다는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개명절차가 쉬워지고 간소화되면서 한때 이름 바꾸기 열풍이 분 적이 있었다. 내 주변에도 이름을 바꾼 사람이 많다. 촌스러워 이름을 바꿨다는 사람도 있고, 사는 게 힘들어서 바꿨다는 사람도 있다.

김춘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의 이름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존경받기를 원한다. 이름을 짓는 것은 부모지만 그 이름을 지키고 보듬어 가는 것은 자식들의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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