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피언스, 혼자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착각
호모 사피언스, 혼자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착각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10.1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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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북토성 넓은 들판에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초록에서 황금빛으로 색깔이 채 바뀌지 않았는데 추수를 서두르는 모양이 하릴없이 시절을 재촉하는 듯해 공연히 마음이 불편하다. 예전 같으면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한 손에 일제히 낫을 들고 허리를 구부려 나락을 베었던 일을 이제는 온통 기계가 대신한다. 집채만 한 콤바인이 몇 번 논바닥을 휩쓸고 지나가면 나락은 일순간에 베어지고 텅 빈 들판만 남는다. 콤바인 한 대와 트랙터에 커다랗게 매달린 철제 곡식 상자 한 개, 그리고 그걸 운전하는 사람 둘 뿐인 가을걷이를 한참동안이나 지켜보았다.

나락은 순식간에 벼에서 분리돼 곡식만 쇠 상자에 뿌려지듯 담기는데, 저렇게 빠른 속도를 거쳐 밥상에 오르는 쌀에도 치열한 무한경쟁의 속성이 고스란히 담길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씁쓸하다.

한자 쌀 미(米)자는 88번 사람의 손길이 미치고 난 후에 비로소 밥상에 오르게 됐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모여 허리를 숙이고 경건한 마음으로 나락을 베되 곡식 한 알이라도 떨어트리는 일이 없도록 차분하고 신중하게 벼를 베도록 했다. 추수는 한 해 동안의 수고로움을 돌아보는 반성과 격려, 그리고 그 쌀을 먹는 사람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고귀함이 담겨 있다. 순식간에 농기계와 그마저 몇 안 되는 사람들도 떠나 텅 비어 남아 있는 들판에서 옛일을 생각한다.

아버지는 벌치는 일을 하셨다. 본래의 직업은 따로 있었는데, 봄부터 가을까지 아버지는 꽃을 따라 들판으로 산속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시는 수고로움을 즐기는 듯했다. 아까시가 한창인 봄에는 나도 어김없이 꿀 수확에 끌려나갔는데, 어린 나는 동트기 전 새벽부터 나서야 하는 이 일이 너무 싫었다. 아주 작은 곤충이 쉬지 않고 물어 나른 꿀을 인간이 순식간에 빼앗는 일이 너무 잔인하다는 순진한 생각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보다는 꿀 수확을 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벌침은 끔찍했다.

사람들의 꿀에 대한 욕심은 갈수록 커지고 밀원(蜜源)은 점점 줄어들다 보니 최근에는 사양꿀이라고 설탕을 뿌려 벌에게 먹인 뒤 이를 꿀로 만드는 변칙도 일종의 꿀로 대접받는 세상이 되었다.

충북 제천시가 최근 양봉산업의 활성화와 주민 소득증대를 위해 백운면 운학리 일대에 50ha 규모의 아까시 밀원숲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내년부터 2024년까지 매년 10ha씩 인공으로 만들어지는 아까시 숲은 국내 최대 꿀 품종인 아까시 꿀의 생산을 늘리면서, 잎과 나무껍질에 포함된 항바이러스 성분으로 산림치유에도 도움이 된다고 제천시는 설명하고 있다. 작물 위주의 농업에 치중했던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농사에 방해가 된다고 마구잡이로 제거했던 아까시나무를 다시 아쉬워하게 된 세태가 안쓰럽다.

도심의 가로수들이 저마다의 색깔로 단장하는 단풍의 계절에 나는 심각한 `가을의 비애'로 몸살을 앓는다. 노란 단풍이 아름다운 곳곳의 거리에서 새로 심은 가녀린 은행나무들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불편함을 호소하는 인간 욕망의 끝을 의심한다.

열매에서 풍겨나는 냄새에 치를 떨며 끊임없는 민원을 제기하는 바람에 도심의 은행나무 중 암나무는 찾아볼 수 없다. 인간에 의해 심각한 성비의 불균형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은행나무는 페름기(2억3천~2억7천만 년 전), 또는 쥐라기(1억 3천5백~1억 8천 만 년 전) 이전부터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버텨왔다. 열매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것은 동물의 먹이가 되지 않고 살아남아 종족 번식을 꾀하기 위한 생존전략인데, 외피를 버리고 속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생물은 사람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 인간이 단순히 냄새가 싫고 거리를 어지럽힌다는 가벼운 불편함으로 아예 번식의 기회조차 빼앗는 것은 `살아있는 화석' 은행나무마저 멸종시키고야 말겠다는 속셈이 아니겠는가.

지구를 지배한 호모사피엔스는 정녕 혼자만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가. 영영 짝을 찾지 못하고 따라서 종족 번식의 기회 역시 만들지 못할 어리고 앙상한 숫 은행나무와 위험지대로 진입한 저출산의 나라를 연상하는 것이 지나친 비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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