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와 어머니
도토리와 어머니
  • 송용섭 충북농업기술원장(교육학박사)
  • 승인 2019.10.14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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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송용섭 충북농업기술원장(교육학박사)
송용섭 충북농업기술원장(교육학박사)

 

스치는 바람이 더할 나위 없이 선선한 가을 산은 온통 도토리 세상이다. 올해는 해거리가 없어 그런지 최근 잦은 태풍으로 비바람이 몰아친 다음 날이면 도토리가 즐비하여 발에 차인다. `개밥에 도토리'신세다. 우암산에는 어린 시절 방과 후에 헝겊 쌀 포대와 도끼를 둘러메고 어머니 따라 도토리 줍던 추억이 서려 있다. 어린 소년은 도끼머리로 힘을 다해 참나무 밑동을 내리쳤고 머리 위와 사방으로 우두둑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에 신바람이 났었다.

어느 날은 도토리를 찾아 눈이 빠지도록 수풀을 헤집고 다니다가 땅벌 집을 건드렸다. 부리나케 달아났는데도 벌떼의 집중폭격에 어머니가 실신해 버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한 큰 사고였는데 그때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토리 철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산에 또 올랐다. 지금 나이 들어 거목이 된 나무들에는 도끼 머리로 얻어맞은 자리가 남아있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슬며시 웃게 된다.

`도토리 키 재기'라는 속담이 있듯이 열매 크기는 비슷하지만 모양은 제각각 서로 다르다. 그 연유는 이렇다. 흔히 도토리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서식하는 신갈나무를 비롯하여 떡갈나무, 갈참나무 그리고 졸참나무 등 여러 종류가 모두 참나무속에 속한다. 이들의 열매가 모두 도토리라고 불리어 모양새는 둥글거나 타원으로 아주 다양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도토리는 구황식물로 이용하였으며 주로 묵을 쑤어 주린 배를 채웠는데 먹을 것이 넘치는 요즘은 별식으로 여겨진다. 도토리묵은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을 요하는 대표적인 슬로우 푸드(slow food)다.

어릴 적 묵을 만들기까지 어머니 곁에서 간간이 지켜본 적이 있다. 우선 한두 말 정도 도토리를 주워 모으고, 단단한 껍질을 까기 쉽도록 양지에서 바짝 말려야 한다. 그런 다음 절구로 곱게 빻아 물에 담그고 삼사일 동안 여러 번 물을 갈아주면서 떫은맛을 우려내야 한다. 이 떫은 탄닌 성분이 어느 정도 빠지면 웃물을 따라내고 가라앉은 앙금을 걷어 다시 말려야 도토리 가루를 얻게 된다. 이제 묵을 쑬 차례, 도토리 가루와 물을 다섯 내지 여섯 배 정도의 비율로 섞어서 끓이게 되는데 이 과정이 꽤나 힘들게 느껴졌다. 용암처럼 끓어올라서 튀기고 쉽게 엉기기 때문에 팔이 빠질 정도로 쉼 없이 저어야 한다. 죽 같은 걸 틀에 부어 식히면 비로소 묵이 완성된다. 요즘은 시장에서 아무 때나 살 수 있지만 국산 도토리가루만 넣은 도토리묵,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면 탱탱하게 살아 움직이는 참 묵을 맛보기는 어렵다.

어느덧 동식물의 생태계 보전을 위하여 도토리도 일부는 자연에 돌려주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도토리묵의 참맛은 그립다. 손수 묵을 쑤어주시는 우리 어머니들은 자랑스러운 인간문화재이신데, 소중한 시간은 흘러가고 그 솜씨를 이어갈 딸과 며느리를 위시한 자손들은 드물어 아쉽다.

지난 휴일 아침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가 “오늘은 일하러 나가지 말고 도토리 좀 주워오면 안 되겠니?”하고 물으셨다. 어머니 눈에서 어릴 적 같이 뒷산에 올라 도토리 줍던 착한 아들로 돌아와 주길 바라는 마음이 읽혀졌다. 이번 주말 하루는 모든 일 제쳐 두고 노모의 그 정겨운 뜻을 받들어 모실까 한다. 어쩌면 다시 맛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어머니의 도토리묵을 이 가을 가기 전에 꼭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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