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책을 품는 가을
시월, 책을 품는 가을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19.10.07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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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선선한 기운이 창가에 가득하다. 찬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한로(寒露)가 지났으니 이제 가을은 점점 깊어가고 농부들은 추수를 시작할 것이다. 몇몇 지인들에게 가을이 오면 가장 먼저 해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단연코 여행과 독서라는 답을 많이 했다. 생각해 보니 가방에 책 한 권 끼워 넣고 여행을 떠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가을맞이가 어디 있을까 싶지만, 늘 시간에 쫓기는 직장인들이라면 평소 읽고 싶었던 책 속으로 무한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바야흐로 책 읽기 좋은 계절, 가을이다. 고 신영복 교수의 유고집『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에는 ‘책은 먼 곳에서 찾아온 벗’이라는 제목의 수필 한 편이 있다. 독서란 자기가 갇혀 있는 문맥, 우리 시대가 갇혀 있는 문맥을 깨트리고, 드넓은 세계로 나가는 자유의 여정이라는 삼독(三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글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어느 가을이었다. 나는 혼자 마루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공주님도 되었다가, 왕자님도 되었다가, 일인다역의 목소리를 소리 내 재현하며 읽고 있는데 아버지가 가만가만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조용히 옆에 와 앉으셨다. 그러곤 “책 읽는 소리가 참 좋구나.”하셨다. 이 칭찬의 한마디는 후일 내가 책을 가까이하는데 작은 불씨가 되었다.
몸이 약해 하루일과 중, 학교를 다녀오는 것 외엔 대부분을 집 안에서 보내던 때,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책이었다. 밖에 나가 놀다가도 금방 숨이 차고 지쳐 집으로 들어오기 일쑤였던 그 시절을 독서로 채웠다. 몸도 약했지만 ‘참 좋구나!’하는 아버지의 칭찬 한마디가 자꾸 듣고 싶었던 어린 날의 앳된 마음이, 훗날 책에 흥미를 갖게 했고 습관으로 이어져,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오도록 도와준 나의 말 없는 오랜 벗이 되었다. 
십 대에는 주로 소설을 읽었다. 여러 단편집을 접하고 ‘한 줄 문장이 주는 아름다움’에 푹 빠져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 여운은 학교수업시간으로까지 이어져 수업 중 책상 밑에 몰래 소설책을 숨겨놓고 읽다가 선생님께 들킨 적도 여러 번이다. 그때마다 복도에 나가 손을 들고 벌을 서기도 했지만 돌아보니 그 순간의 기억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그때 읽었던 책들은 시골에서 그저 병약한 아이가 학교와 집을 오가며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데, 한줄기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했고 다양한 여러 사람의 삶을 간접으로 살게 한 고마움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성년이 되어서는 시를 좋아해 한때는 시집(詩集) 사 모으는 취미가 생겼다. 집에서 버스로 삼십 여분을 나가면 정류장 앞 대로변에 작은 헌책방이 있었는데 새 책 한 권의 값으로 여러 권의 시집을 살 수 있었다. 서점 사장님은 가끔 상태가 좋은 책이 들어오면 먼저 연락도 해 주시고, 거저도 주시며 인정을 베푸셨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는 고전을 가까이 두고 있다. 옛 성현의 말씀은 복잡하고 바쁜 일상에서 관점의 균형을 잃지 않게 해 주는 나침판의 역할과 더불어 내 삶의 속도를 늦춰주는 쉼표의 노릇도 한다.
하루만큼 또 무르익은 가을, 좋아하는 책 한 권을 옆에 두고 틈틈이 내 벗으로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그것이 어떤 종류의 책이든 상관은 없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차곡차곡 쌓이고 그 시간이 발효되면 삶은 한층 충만함으로 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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