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을 기념하며 다시 세종대왕을 생각하다
한글날을 기념하며 다시 세종대왕을 생각하다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9.10.07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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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2019년 10월 9일은 훈민정음 반포 573돌을 맞이하는 한글날이다. 이 날은 한글을 창제해서 세상에 펴낸 것을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정한 국경일이다.
1926년 음력 9월 29일 ‘가갸날’로 시작된 기념일은 1928년 ‘한글날’로 이름을 바꾸어서 지키게 되었고, 1945년 광복 후에 양력 10월 9일로 확정되었다. 국경일로 지정된 것은 2006년부터다. 또한 세종어제(世宗御製) 서문과 한글의 제작 원리가 담긴 훈민정음(訓民正音)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97년 10월에는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록되어 한글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 영화 한 편이 한글 창제에 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세종대왕이 아니라 신미라는 승려가 한글을 창제했다는 내용으로 영화의 스토리는 전개가 된다. 이 영화에서 한글 창제의 주된 역할을 했다고 묘사되는 신미라는 승려를 찾아보니 본명은 김수성이고 조선 초기에 살았던 불교의 승려로 나온다. 1435년에 신미대사에 의해 간행된 ‘원각선종석보’라는 책이 한글이 창제되기 8년 전에 출간되었는데 이 책에 한글이 나오고 신미대사가 세종임금으로부터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는 뜻의 시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영화의 내용은 신미대사가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을 연구하고, 인도의 범어를 비롯해 티벳 문자 등 언어에 능통한 것으로 나온다. 자음과 모음이라는 인도 범어의 구성을 모방해 창제하였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상상력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면 한글 창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공로에도 신미대사가 기록에서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조선이 성리학의 나라이고 숭유억불이라는 국가의 정책 때문에 사대부들이 기록에서 제외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1435년에 신미대사에 의해 간행된 원각선종석보라는 책은 위작일 가능성이 크고, 세종으로부터 받은 시호도 한글 창제 공로가 아니라 한글로 된 불경인 ‘월인석보’등의 간행과 관련한 공적 때문에 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역사적 사실이다. 1443년 12월 세종실록에 ‘임금이 직접 언문인 28자를 만들었다.’라고 기록한 부분이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이다. 그리고 한글 창제의 1등 공신인 신숙주도 보한집에서 ‘왕이 28자를 만들고 언문이라고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글이 반포되고 3년간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과 원리, 그리고 실제적인 활용이 대해 설명한 해례본을 만들었는데, 여기의 서문에도 ‘전하창제’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중국의 음을 모두 한글로 적은 동국정운이라는 책의 서문에서도 신숙주는 ‘성과 음을 하나하나 정함에 모두 상감의 재가를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다른 학자들도 한글 창제가 세종대왕의 작품이라는 기록을 많이 남겨 놓았다.
백성에 대한 사랑의 결과물인 한글에 관해서 정인지는 해례본 서문에서 ‘슬기로운 사람은 아침이 끝나기 전에 깨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알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다. 전 세계 많은 문자 가운데 창제의 목적과 창제한 사람, 창제해 반포한 날짜가 정확하게 나타나는 문자는 지구 상에 한글이 유일무이하다.
안질로 평생을 고생하면서 한글과 자신의 눈과 맞바꾼 사람이 세종대왕이시다. 우리 민족의 가장 축복은 세종대왕이 우리 민족의 스승이 되신 것이다. 가장 과학적이면서 가장 아름다운 글자인 한글. 세종대왕의 사랑의 결과물을 더 사랑하고 발전시켜야 할 책무가 우리 후손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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