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을 벗어나 자연을 품은 정자, 제천 탁사정(濯斯亭) 
세속을 벗어나 자연을 품은 정자, 제천 탁사정(濯斯亭) 
  • 김형래 강동대교수
  • 승인 2019.10.0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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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김형래 강동대교수
김형래 강동대교수

“제천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 위에 터를 잡았는데,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산이 낮고 밝아서 많은 사대부가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 기록한 제천의 모습이다. 또한 “제천의 북쪽은 평창과 가깝고 동쪽은 영월과 경계가 맞닿았다. 많은 산과 깊은 골짜기가 있으니 참으로 난리를 피하고 속세를 피할 만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제천은 혼란기에 또는 관직에서 은퇴 후 세속을 벗어나 한적한 곳에 은거하면서 자기 수양을 하기에 이상적인 곳이었다.
탁사정(濯斯亭)은 원주에서 제천으로 들어오는 국도변, 높은 절벽 위 소나무숲 속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구학산과 감악산 사이 궁골(弓谷)의 뾰족한 바위로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었다. 전면의 기암절벽 밑으로는 용암천이 굽이쳐 흐르고 있다.
이곳은 원래 옥호정(玉壺亭)이라는 정자가 있던 자리였다. 1568년(선조 1)에 제주수사(濟州水使)를 지낸 임응룡(任應龍, 1523~1586)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해송 여덟 그루를 가져와 심고 이곳을 팔송(八松)이라 명명하였다. 이 일대의 지명인 팔송리(八松里)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의 아들 임희운(任希雲)이 정자를 짓고 ‘팔송정(八松亭)’이라 칭하였다. 이후 허물어진 팔송정을 1925년에 후손 임윤근(任潤根)이 옛터에 다시 세웠고, 원규상(元규常)이 ‘탁사정(濯斯亭)’이라 이름 지었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불탄 것을 1957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탁사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자는 사방을 바라보기 좋게 벽이나 문 없이 탁 트여 있고, 사방으로 머름 난간을 둘렀다. 정자 내부의 동·서·남 3면에는 ‘탁사정(濯斯亭)’현판을 비롯하여 ‘탁사정기(濯斯亭記)’등 많은 현판이 걸려 있으나, 현판의 제작 시기는 알 수 없다.
탁사정은 건축 자체는 뛰어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주위로는 오래된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앞으로는 기암절벽 밑으로 맑은 물줄기의 계곡이 굽이쳐 흐르면서 깊은 소를 만들고, 그 너머에 봉황산 산줄기가 파노라마 같은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선비들이 유유자적하게 자연을 음미하고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구한말 유인석의 제천 의병에 가담했던 정운호(鄭雲灝, 1862~1930)는 고향 제천의 풍광을 칠언 율시로 형상화한 「제천팔경(堤川八景)」을 남겼는데, 이곳 탁사정에서 노니는 물고기(岱巖遊魚)를 제3경으로 꼽았다.
이처럼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탁사정은, 지금도 제천이 자랑하는 10경 가운데 제9경에 해당한다. 현재 임응룡이 가져와 심은 해송 여덟 그루는 모두 죽고 한그루도 남아있지 않지만, 지금도 여름철이면 탁사정 주변 백사장과 맑은 물을 찾아 많은 피서객이 찾아오니, 예나 지금이나 모두의 사랑을 받는 명소임이 틀림없다.
‘탁사정’이란 정자 이름은 중국 초(楚)나라 사람이었던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에 나오는 ‘창랑지수청혜탁오영(滄浪之水淸兮濯吾纓 :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지수탁혜탁오족(滄浪之水濁兮濯吾足 : 물이 더러우면 내 발을 씻는다)’이라는 글귀에서 유래한다. 곧 세속의 모든 때를 깨끗이 씻고 자연과 같이 소박하게 살아가자는 의미를 품고 있다.
물질 만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세상일로 너무 지쳐 있다고 느낄 때 탁사정에 오르면, 가슴 깊이 파고드는 시원한 솔바람 소리와 웅장하게 뻗어나간 산줄기들과 발밑을 휘감아 흐르는 맑고 깊은 물이 지친 마음을 씻어내고, 새로운 삶의 지혜와 의지가 솟구치게 하는 활력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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