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가위
마음의 가위
  •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19.10.0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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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퇴근했는데, 당장 보고 싶은 자료가 있어 밤 9시가 넘은 시각에 학교에 갔다. 자료를 챙겨 나오면서,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아이들을 보러 교실에 잠시 들렀다. 그런데 두 명이 자리에 없었다. 남아있는 아이들이 당황한 듯 말하길, 한 명은 아파서 집에 간 거 같고, 또 한 명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미리 담임인 내게 허락을 받거나, 갑자기 사정이 생겼으면 문자라도 해야 했다.
이전에도 이런 무질서가 있었는데 내가 몰랐나? 전혀 그럴 아이가 아니라고 여겼는데, 내 믿음은 틈이고 나의 나태였던가? 과거에서 현재까지, 한 아이에서 여럿에게로, 교실 안에서 교실 밖으로, 그리고 내게로, 가시 돋친 덩굴 가지가 무한히 뻗칠 기세로 꿈틀대었다. 얼른 마음의 가위를 꺼내 아직은 연한 가지의 아래 둥치를 싹둑 잘랐다. 서늘한 백지장을 베고 언제 잠이 들었을까.
다음 날은 학급 아침 청소의 마지막 날이었다. 출석을 부르고 진입로, 주차장, 현관과 실내에 청소를 배치하였다. 한 주 동안 30분이나 일찍 등교하였는데, 조금 늦게 나온 아이는 있지만 안 나온 아이는 없다. 오늘도 모두 출석이다.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어 잠이 부족할 텐데, 아이들은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더 해맑다. 진입로를 쓸다가 선생님 차가 들어올 때마다 양옆으로 피해 섰다가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고, 마당쇠 역할 놀이를 하며 자지러지기도 한다.
“선생님, 더 할 곳 없어요?”
제 구역을 마친 혜미가 다가와서 묻는다.
혜미와 함께 다가와 비질하는 몇몇이 어젯밤 몇 시간을 공부했는지 조잘댄다. 내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더니, 넷이서 공부 시간 내기를 했는데 지금 자기 팀이 이기고 있다며 설명해 준다. 자기 몫을 열심히 했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눈빛, 제 몫을 잘해 준 친구에게 건네는 믿음과 응원의 미소가 아침 햇살에 더욱 반짝였다.
청소가 끝난 후 홈베이스에 모여 일주일간 고생했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하였다.
“선생님, 저것 좀 보세요.”
긴 복도의 창가 쪽에 놓인 사물함 위에 쌓인 먼지가 햇빛을 반사하여 선명했다. 6개 교실 앞을 가로지르는 긴 먼지 카펫이다.
“역시 혜원이의 눈이다. 닦아 줄 거지?”
잠시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옆에 있던 채린이가 함께 해주겠다고 한다. 혜원이는 틈틈이 내가 놓치는 부분을 일러주는 세심한 눈을 가졌다. 어느 날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무릎담요를 모두 예쁘게 개어 놓기도 했다. 잠시 후 교무실에 혜원이와 채린이가 시커멓게 된 걸레를 가지고 와서 먼지가 얼마나 많았는지 설명하고 갔다.
조회를 마치고 나오는데 유진이가 따라나와 나란히 옆에 걸으며 이야기했다. 어제 학원을 그만두고 야간 자율학습을 시작한 첫날이었는데, 기침이 심해서 친구들에게 방해될 것 같아 중간에 갔다고 했다. 그랬구나. 그러나 감독 선생님께 허락받고 가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한솔이는 어제 야간 수업에 간 것을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거였다. 한솔이가 그럴 리가 없지. 오히려 내가 미안한 입장이 되었다.
내 머릿속 백지장은 아이들을 만난 지 30분 만에 온기를 되찾고 다시 일상의 이야기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밤새 스스로 키운 가시넝쿨에 상처받았을지도 모를 담임을 위하여, 오늘 아침 모두가 합심하여 잔잔한 일상 플래시몹을 펼치고는 시침 뚝 떼고 있는 건가? 녀석들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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