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에서 '기생충'까지
'벌새'에서 '기생충'까지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10.01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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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기억을 소환하는 일은 저마다의 인생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일까.’
영화 <벌새>는 1994년으로 우리를 되돌려 놓으며, 마치 ‘벌새’와 같은 아주 작은 떨림으로 잊고 지냈던 날들을 자극한다. 영화 <벌새>는 김일성이 사망하고, 성수대교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당시의 현실을 텔레비전 뉴스 화면을 통해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 그해 1994년의 속살을 다시 들추어내며 강제 주입한다.
1994년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이던 은희가 그런대로 성장해 지금 2019년의 대한민국에 여전히 살고 있다면 어느덧 38살 무렵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고, 그 2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상은 많은 것을 그때와는 전혀 다르게 고착화시키고 있다. 중학교 1학년 교실에서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라는 구호를 반복해서 외치는 1994년에 비해 서열화와 일류지향성은 2019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 훨씬 강렬한 상징과 울타리로 세상을 위압하고 있다.
대치동에 살고 있고, 온 가족이 모여 지독한 침묵 속에서 돈을, 그것도 어린 여중생의 여린 손바닥이 빨개지도록 아파트 거실에 가득 흩뿌려진 지폐를 세고 있는 1994년의 떡집. “서울대 너무 멋있었지? 교정이 아주 넓고 멋있어. 오늘 이렇게 기운을 받고 왔으니까 대원외고 합격하고, 3년 후엔 서울대도 합격하자”는 희망이 그 떡집에 25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무모하다. 그 떡집은 지금쯤 프랑스어 간판이 달린 프랜차이즈 빵집으로 바뀌었거나, 대기업에 상권을 넘기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지경이다. 떡집 아들이 서울대에 갈 꿈조차 이미 사치일 것이라고 믿는 개연성은 짙어지고, 일류를 향해 오를 수 있는 사다리가 아직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는 2019년은 없다.
1994년 여중생 은희는 지극히 가부장적 집안에서 뚜렷한 남아선호의 속성에 자주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대치동에 살면서 공부를 못해서 강북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언니를 포함해 다섯 식구가 ‘콩가루’ 같지만 그럭저럭 살던 1994년의 가족은 이미 해체되었고, 2019년 우리는 최악의 저출산을 걱정만 하면서 정작 그 근본적인 원인 해결에는 관심이 없다.
영화 <벌새>의 은희가 만나는 세상은 스산할 정도로 침착하다. 트램펄린을 뛰면서 공중으로 치솟아 오르는 은희와 친구의 모습은 그렇게 침잠하는 세상을 거스르는 소녀의 일시적 해방구로 기능한다. 그러나 1994년의 현실은 혼자 병원에 가고, 수술을 받으며 혼자 병실에 남아있는 것이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 이면에는 치열한 기성세대의 먹고사는 일 또는 자본의 욕망에 대해 드러나지 않는 그늘일 뿐이다. 그리고 ‘부자 되세요~’를 강요하며 신용카드 사용을 부추기던 자본의 욕망은 25년이 지난 지금 지독한 소득 불균형과 불평등, 그리고 기회마저 공정하지 않음을 더욱 확연하게 만드는 공동체의 몰락과 퇴화의 세상이 더욱 굳어지고 있음을 모르는 체 할 뿐인 2019년을 살고 있다.
다리는 인간과 인간, 공간과 공간, 관계와 관계를 연결해주는 통로이며 수단이다. 그해 1994년에 무너진 성수대교로 인해 우리는 단절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뜻하지 않게 목숨을 빼앗기고 세상에서 밀려난 평범한 사람들의 비극은 누구 탓인지 통곡하며 분노하는 시간을 잠시 갖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벌새>에서 제 시간을 맞추지 못해 가까스로 살아남아 목 메이는 밥숟가락처럼 가족에 대한 연민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확인할 수 있는 통로는 없다.
기억을 소환하는 일은 때때로 지극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그 고통을 외면하거나 지우려 한다면 그 또한 반성과 화해, 그리고 용서의 과정을 생략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벌새>에서 <기생충>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불법이거나 탈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인간적인 삶과 더 나아짐, 그리고 솟구침을 향한 용기마저도 쉽지 않은 추락의 세상과 매일 만나고 있다.
과학적으로 ‘벌새’는 우리나라에 살지 않는다. 밤에 피는 박꽃이 그리운 건 벌새가 아닌 곤충 박각시 나방.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가을 밤 정취가 더욱 그리운 2019년 10월. 1994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고,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경계하며 촛불을 일렁거리는 사람들의 거리는 뜻밖의 2019년과 조우하는 ‘우리 안의 어떤 것’으로 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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