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계절
귀뚜라미 계절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19.09.30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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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욕실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구애하는 일이 가을 전령사로서의 소임까지 완수하는 것이라면, 귀뚜라미는 생각보다 영리한 동물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지 침대에 누워 생생하게 가을을 만끽하는 게 나쁘지 않다. 다른 벌레였다면 벌써 찾아내어 퇴출하고도 남았을 텐데, 며칠째 로얄박스에서 오페라를 감상하듯 귀뚜라미의 세레나데를 그냥 듣는 중이다. 봄에 샷시와 방충망을 다 교체했는데 도대체 귀뚜라미는 어느 틈으로 들어와 샤워 커튼 안자락에 자리를 잡은 걸까? 하긴, 아무리 철통같이 차단한들 오는 가을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얼마 전에 맹난자님의 ‘홍시’라는 제목의 짧은 수필을 읽었다. 아직 푸른빛이 가시지 않은 감 서너 개를 채반에 받혀 창가에 두고, 홍시가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 내면의 떫음을 익혀내는 발열과 인고의 시간을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어쩌자고 철들지 못한 떫음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말하는 작가의 성찰이 진한 여운으로 남았었다. 혼자 느끼고 말기에는 못내 아쉬워 지난주 수필 수업 시간에 모범 글로 가져가 문우들과 다 함께 읽고 소감을 나눴다. 
우리 집은 부엌 창문 밖으로 아파트 정원수가 보인다. 남들은 전망 좋은 고층을 선호한다지만 난 흙 기운 느껴지는 2층이 더 좋다. 식탁 의자에 앉아 주목 꼭대기에 날아드는 까치며 나비, 잠자리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설거지하다 고개를 돌리면 감나무가 시야에 들어온다. 감나무는 지난여름 힘든 시간을 지나왔다. 태풍 ‘링링’의 거센 바람에 무섭도록 흔들려 걱정스럽더니, 쓰러질 듯 견디면서도 절대로 놓지 않았던 열매들이 야무지고 탐스럽게 달려있다. 아직은 시퍼런 땡감이 홍시로 익어가는 모습은 또 얼마나 근사할까? 시나브로 변해가는 풍경을 코앞에서 볼 생각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다.
목성균수필가는 ‘백로’라는 수필에서, 꼭 맘먹고 담은 밥사발처럼 소복해진 벼 이삭들을 보며 ‘결실은 끝났다. 얼마나 잘 여무느냐 하는 것은 절기가 알아서 할 일이지 더 이상 농부의 소관이 아니다.’라고 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었다. 자식들 반듯하게 키워놓고, 노년을 평온하게 보낼 만큼 저축도 해 놓았다. 이제부터는 나이가 듦에 따라 저절로 지천명(知天命)이었다가 이순(耳順)을 지나 종심(從心)을 사는 거라고 고민 없이 생각해왔다. 등이 갈라지는 아픔을 일곱 번쯤 겪어내고 비로소 날개를 얻게 된 귀뚜라미가, 어느 날 수박 고르듯 내 안을 두드리며 “익었느냐?” 물어오기 전까지는.   
감이 익어 가면 이젠 나도 풍경보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밀한 변환의 과정을 더듬게 될 것 같다. 천명을 알아야 할 나이에, 고스란히 떫음을 간직한 채 이제 겨우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으니 부끄러운 노릇이다. 한 가닥의 햇빛도, 한줄기의 바람도 허투루 흘려버리지 못할 만큼 시간이 아까운 상황이긴 하지만, 조금 늦는다고 하더라도 뜨거워지고 묵묵히 기다리는 과정을 제대로 살아내고 싶다. 삶이 그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니까. 깊은 단맛을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익어보다가 눈 속에 묻혀 겨울 까치밥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족하다.
귀뚜라미 소리가 사라졌다. 그도 충생(蟲生)의 완성을 향해 계절 속 깊은 곳으로 떠났는가 보다. 아쉬운 것은 없다. 나도 이미 가을 속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다만, 이 계절이 부디 마디게 지나가 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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