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리는 힘은 경건의 능력입니다
찔리는 힘은 경건의 능력입니다
  • 김성일 보은 아곡 은성교회 담임목사
  • 승인 2019.09.2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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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김성일 보은 아곡 은성교회 담임목사
김성일 보은 아곡 은성교회 담임목사

 

성경에 보면 마지막 말세에 때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장1절~5절)

세상의 어느 시기이든 힘들고 어려울 때면 말세를 언급하며 시대적 환경을 빗대어 이야기 하곤 했습니다. 대부분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에 따른 주장이었는데 성경에는 다양하게 말세에 관한 설명들이 있습니다. 여러현상에 대한 예언중 위의 내용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사상 마음에 관한 예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위의 성경의 내용처럼 점점 더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주의로 철저하게 변해가며 돈을 사랑하는 일에 무슨 일이든 서슴치 않는 그러한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세상의 마지막 때가 오고 있는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더구나 성경은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능력이 없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어 두려움으로 우리 믿음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온통 세상의 관심은 찌르는 힘에 관심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경쟁하여 남들보다 큰 힘을 갖는 것 곧 이것이 세상의 행복한 삶으로의 연결이고 그 큰 힘을 갖는 것이 성공이라고 여겨 그 힘을 갖기 위해 모든 수고와 노력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세상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찌르는 힘이 아니라 찔리는 힘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남들 위의 군림이 아니라 섬김의 자리를 찾아 겸손하게 낮아지는 것에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은 없다는 말씀은 곧 지금의 우리 교회 현실을 말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교회도 세상의 현상처럼 찌르는 힘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표면적인 믿음은 그렇지 않은데 마음속 깊은 곳의 바람은 복이라는 개념아래 더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갑이 되고 싶어하고, 지배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대형교회가 되고 싶어합니다. 온통 관심사가 이 땅에서의 찌르는 힘에 관한 일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곳에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살아감에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찌르는 힘이 아니라 찔리는 힘에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찌르는 힘이 아니라 찔리는 힘입니다. 찔리는 힘은 경건의 능력입니다. 말과 혀로는 원수를 사랑하지만 실제론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다시 경건의 능력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찔리는 힘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찌르는 힘이 아닌 찔리는 힘에 관심갖고 경건의 능력으로 사는 복된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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