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방조자
침묵의 방조자
  • 이명순 수필가
  • 승인 2019.09.24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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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명순 수필가
이명순 수필가

 

전국 집회를 한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같은 일을 하는 종사자들이 처우 개선 및 정년 문제 등 여러 가지 시급한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해 관계 부서와 수없이 많은 조율을 했다. 하지만 서로의 입장 차이가 커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전국 곳곳에서 각자의 업무에 충실한 힘없는 종사자들이지만 두드리면 열릴 거란 믿음으로 끝없이 타협을 시도했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전국 각지의 종사자들에게 동의서를 보내달라고 했다. 마음을 모으고 뜻을 함께한다는 서명이다. 같은 지역에서 몇 명의 의견을 모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물며 전국 각지의 얼굴도 모르는 종사자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게 쉽겠는가. 집행부에선 전국의 종사자들에게 연일 참여를 호소했지만 공허한 울림처럼 호응이 쉽지 않았다. 물론 함께 참여는 못하지만 응원한다는 메시지도 많았고, 성원의 목소리도 높았다.

집행부에서 애쓰는 분들은 개인의 시간을 희생하며 봉사에 헌신하는데 같은 종사자들의 동의가 늦어지자 어느 한 분이 모두를 위한 일에 무임승차는 하지 말라고 했다. 농부도 땀 흘려 일해야 열매를 얻는다. 앞장서서 봉사는 못할지언정 무임승차는 하지 말고 동의서라도 보내달라는 강력한 외침이다. 혼자 편하게 무임승차하지 말라는 말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러 왔다. 쉽지 않을 일에 대한 걱정이기도 하다.

오래전 중국에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버스 44>란 단편 영화가 있었다. 여성 운전기사가 버스를 운행하는 중에 산길에서 폭력배들이 타더니 손님들의 금품을 빼앗고 여성 버스기사를 숲 속으로 끌고 갔다. 승객들은 모두 모른척하고 있는데, 중년 남자 한 명이 말리다가 심하게 얻어맞는다.

얼마 후 여성 버스기사가 돌아오더니 아까 폭력배를 제지했던 중년 남자에게 다짜고짜 버스에서 내리라고 한다. 남자가 황당해하며 안 내리고 버티니까 승객들이 그를 강제로 끌어내리고 짐도 던져 버렸다. 그리고 버스가 출발했는데 커브길에서 그대로 낭떠러지로 추락한다. 중년남자는 아픈 몸을 이끌고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사고 현장을 목격한다.

교통 경찰관이 말하길 버스가 추락해 승객 전원이 사망했다고 말한다. 낭떠러지 밑을 바라보니, 자신이 타고 왔던 그 44번 버스였다. 여성 운전기사는 오직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유일하게 폭력배들의 악행을 제지했던 그 중년 남자를 일부러 버스에서 내리게 하고, 모른 척 외면했던 승객들을 모두 지옥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새삼 영화 줄거리를 떠올리며 나 역시 버스 안 승객들처럼 침묵의 방조자는 아닐까 하는 자책이 들었다. 작년 서울 집회에는 만사 제쳐놓고 참석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집회 참석 여부를 알려 달라고 했을 때 이런저런 개인 일정으로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이번 집회는 우리 종사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요즘은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너나없이 살기에 바쁘겠지만 모두를 위한 이번 일이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한 일이다. 오래전 시골 동네에서 잠시 버스에 무임승차 했던 일은 한때의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지만 지금 현재의 무임승차는 무책임한 44번 버스 승객 중 한 명일 뿐일지도 모른다. 동료의 서명이 담긴 동의서를 가지고 우체국으로 가며 계속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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