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지금 지나가는 중
가을, 지금 지나가는 중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9.24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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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점심식사를 마치고 잠시 조그만 공원을 거닐고 있을 때, 추분을 아랑곳하지 않는 매미 울음소리가 처량하다.

<전략> 공중에서 일가를 이루던/ 나뭇잎들이여 먼지들이여/ 세월의 녹색 철문이 쿵! 하고 닫히는 순간/ 어느새 훌쩍 자란 침엽수처럼/ 보이지 않는다 잡히지 않는다/ 온 곳으로 돌아가는 길/ 이 세상에 지나가는 것들은 모두/ 그곳으로 가는 길/ 태양이 담벼락에 널려 있던/ 저의 햇빛을 데려간 자리/ 여름의 목 쉰 매미들이 돌아간 자리/ 그곳으로 가기 위해 태어나고 사랑한다/ 모두가 온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금 모두가 지나가는 중. <권대웅. 지금은 지나가는 중> 어젯밤에도 그랬다. 밤 10시를 지나 집으로 가는 길. 겉옷을 벗어버릴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며칠 사이 아침저녁의 기온은 스산하고, 술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에 술추렴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벌써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드문드문 비어 있는 밤거리를 걸으며 가을을 생각한다. 플라타너스이거나 은행나무 일지라도, 성급한 잎새들은 맨살이 서러운 피부를 닮아 소스라치듯 낙하하며 함부로 길바닥에 흐르고 있는데, 가을은 도저한 미래지향적 계절임이 분명하다.

버리고 비울 줄 알아야 새 살이 돋고 새로운 움이 겨울을 숨기며 봄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차리기에 맨정신과 맨 몸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지독히 고문 같은 희망을 가슴 깊숙한 곳에 간직하고 있을 때, 우리는 꽃이 지고 나뭇잎이 낙하하는 것과 갑자기 쌀쌀해지는 기온에, 가난하게 드러난 맨살을 서글퍼하거나 서러워하는 탄식에 압제 되지 않을 수 있다.

시인의 말처럼 `지금(은) 모두가 지나가는 중.' 한 몸에서 떨어져 낙하하는 것들과 갈수록 몸을 움츠리는 것에 대한 연민은 끝이 보이지 않는 변곡점의 절정을 향해 온 나라가 편을 가르고 있는 혼돈에 휩싸이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슴없이 한복판으로 치닫는 가을에서 아직 볼 수 없는 미래를 찾아야 하는 일 역시 쉽게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언제 고관대작이거나 독점적 단죄의 권한을 가진 사법기관을 이토록 신뢰해 왔는가. 권력을 가진 모든 집단과 세력들이 그들만의 울타리를 드높이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들의 탐욕적 영역에 기웃거리지 않고 묵인해 왔음은 대부분의 우리가 그것과 상관없이 여태 착하게 잘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이 조국과 국민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서로가 서로에게 신뢰를 무기로 무한 경쟁과 진영논리, 그리고 밀릴 수 없고 무너질 수 없다는 앙칼진 대립의 어느 쪽이든 그것을 미래의 희망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있는 것들이다/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다/ 불이 켜지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다/ 마음도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다/ 우선멈춤 서 있는 전봇대/ 어둠 속에서 껴안고 있는/ 너의 알몸도 지나가는 것이다/ 지하철이 지나갈 때마다/ 건너편 서 있는 당신이 사라진 것처럼/ 어디론가 지나간 것이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만났을까 아뜩하다/ 한 때 내 몸을 흠뻑 적셨던 소나기들/ 눈이 너무 부셔/ 눈물마저도 은빛 지느러미처럼/ 아름다운 날들 속으로/ 눈 먼 사랑이, 모닥불이 지나간다 <권대웅. 지금은 지나가는 중> 그러므로 정작 가을은 미래를 끊임없이 지향하는 능동태.

이토록 `저항과 견제', 그리고 `불평등과 불공정'을 내팽겨 두고 갈등과 반목과 반대가 우리의 온몸을 막아선다 해도, 떨어지고 헤어지며, 멀어지더라도 가을은 반드시 흔적을 남기며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에 충분히 마땅한 계절이다.

“당신들은 우리를 실망시켰고, 우리는 당신들의 배신을 깨닫기 시작했다. 미래 세대의 눈이 당신을 향해 있다. 만약 우리를 실망시키는 쪽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 스웨덴 출신 16살 청소년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말이 바로 가을이다. 아직도 보이지 않는가. 아니면 제대로 보려하지 않고 있는가. 미안해야 할 일을 서둘러 삼가야 하는. 지금, 그리고 언제나 우리는 항상 지나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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