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길에서
초록 길에서
  • 김순남 수필가
  • 승인 2019.09.23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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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순남 수필가
김순남 수필가

 

산책길에 나섰다. 논길에 접어드니 길옆으로 붉게 핀 칸나가 도열하듯 서서 마중한다. `삼한의 초록 길' 걷기는 평지라 부담도 없고, 오고 가는 길에 예쁜 꽃들이 즐비해 눈요기는 덤이라 할 수 있다. 청전 뜰에는 미꾸라지, 오리 등을 이용한 친환경 농법을 도입해 농사를 짓는 농가가 늘어났다.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풍경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며 잘 영근 벼이삭들은 고개를 숙이고 추수를 기다린다.

이 길은 청전동 시민광장에서 의림지를 잇는 3km 남짓한 걷기에 좋은 길이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마라톤을 하는 이,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걷는 젊은 부부, 애완견을 데리고 나오는 사람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 나처럼 혼자 산책에 나선 이들도 많으며 자주 만나게 되는 노부부는 할머니 걸음이 조금 불편해 보이지만 할아버지의 보살핌으로 꾸준히 걸으시더니 눈에 보이게 걸음걸이가 좋아지신 듯하다. 모두가 각양각색의 모습이지만 같은 길 위에서 건강을 위해 걷기에 열중하는 사람들이다.

가을꽃들이 초록 길에 모두 모였다. 봄부터 많은 꽃이 피었다 졌지만, 구월에 피는 꽃들도 의외로 다양하다. 쑥부쟁이 전송을 받고 벌개미취 군락에 이르렀다. 한들한들 여린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모습은 가을의 정취를 한층 더 느끼게 한다. 다문다문 섞여 있는 달맞이꽃 때문인지 연보라 치마에 노랑 저고리를 입은 아이 같다. 키 작은 금불초 꽃무리에 그야말로 뚱딴지 꽃이 생뚱맞을 법도 하지만, 어린 병아리를 몰고 나온 암탉과 수탉처럼 외려 아름답게 보인다. 이에 질세라 작살나무는 꽃인 듯 보석인 듯 보라색 윤기나는 열매를 조롱조롱 달고 자태를 뽐내고 있다.

초록 길 끝에는 의림지가 있다. 삼한시대에 축조하였다는 의림지는 관개(灌漑) 기능을 지금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길옆으로 의림지 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청전뜰 논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웬만한 가뭄에는 저수지 물이 마르지 않으니 다른 지역에 비해 복 받은 고장이 아닐까 싶다.

늘 가던 길을 벗어나 샛길로 들어섰다. 뜻밖에 그곳에는 메밀꽃밭이 펼쳐져 있다. 조금 다른 길로 들어섰을 뿐인데 새로운 볼거리에 눈길이 바쁘다. 곳곳에 세워놓은 허수아비들의 패션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선글라스를 쓴 허수아비가 있는가 하면 누군가 입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괜찮은 의상을 걸치고 보란 듯이 서 있지 않은가.

길가에 있는 정자에 노부부가 앉아있다. 남편에게 물을 건네는 할머니 모습이나 걸을 때 옆에서 아내가 넘어질세라 극진히 대하는 할아버지 모습에서 부부의 애틋함이 묻어난다. 결혼식장에서나 광고에서 덕담으로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되는 데 아름다운 꽃길도 계속 보다 보면 시들해진다. 처음 꽃들을 보고 그 어여쁨에 감탄하던 마음도 차츰 옅어지고 당연하다는 듯이 여겨진다.

석양에 물든 노부부의 모습은 꽃들 못지않게 아름다워 보인다. 꽃길이 아니더라도 오랜 세월의 길을 걸어온 부부가 저토록 애틋한 모습이면 두 분이 걸어온 삶이 꽃길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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