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 이영숙 시인
  • 승인 2019.09.2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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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고 저 지고至高한 모습에 넋을 빼앗긴 헤밍웨이를 떠올린다. 그는『노인과 바다』를 끝으로 삶을 접었다. 『노인과 바다』는 195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인간의 실존 문제를 다룬 이 작품은 여전히 많은 반향을 일으키며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스테디셀러다.

노인이 돛 하나 달랑 띄운 조각배를 타고 먼 바다까지 나가 그 노쇠한 몸으로 6m 가까운 청새치를 낚은 후 다시 청새치를 공격하는 상어와 사투를 벌이면서 끝까지 앙상한 뼈다귀라도 지켜내고자 한 신념은 무엇일까. 실용주의처럼 결과 중심의 업적을 생산해내야 할 시스템에선 무모한 투쟁이며 비난받을 일이다. 실제로 대학에서 학생들과 이 작품을 놓고 하브루타 수업을 했을 때 많은 학생이 노인의 무모함을 비난했다.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보다 우선할 수 없다고 생각한 학생조차도 결국 자신도 산티아고처럼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잡은 청새치를 포기했을 거라고 했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다. 파멸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다.”는 노인의 말처럼 살면서 이따금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가 충돌할 때 딜레마에 빠진다. 바다는 노인에게 무엇이며 청새치는 무엇인가. 해변에서 뛰어노는 사자 무리의 꿈을 꾸며 깊은 잠에 든 노인의 애잔한 모습에서 인간이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내고 싶은 자존감을 읽는다. 거칠고 사나운 인생의 바다에서 각자가 쟁취하고자 하는 삶의 청새치는 서로 다르다.

내가 보는 바다는 어머니 품 같은 여성 이미지다. 어머니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그 순간까지 우리에게 사람답게 살아야 당당할 수 있다고 당부하셨다. 자식은 물론 부모라도 의롭지 못한 일을 하면 역성들지 말라고 하셨던 어머니를 이제 어디에서 만날까.

갈치조림을 유난히 좋아했던 어머니는 생선 살보다 조림 국물에 밥 비벼 드시는 걸 즐기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자식들 먹이려던 전략이었는지도 모른다. 삼 년 전 이곳 남해에서 따개비와 거북손을 잡으며 소녀처럼 깔깔거리시던 모습, 바다를 품고 스러지는 저녁 해를 보며 감탄을 자아내시던 모습이 필름처럼 스친다.

여자를 두 번 죽여야 어머니가 된다던가. 아름답고 예뻐지고 싶은 어머니도 여린 여자였지만, 자식들이 어머니의 여성성을 거세하고 강한 어머니로 재창조했다. 게으른 사람의 몸은 악마의 놀이터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병도 찾아오고 우울도 찾아오는 법이라며 늘 몸을 움직이셨던 어머니, 헤밍웨이가 바다를 `라 마르(la mar), 여성적인 공간으로 해석했듯이 이 바다에서 어머니가 드리운 큰 품을 읽는다.

해가 물품으로 들어가면/ 바다는 조용히 해를 품고/밤새워 뒤척이며 자잘한 입덧을 한다// 쿨룩거리며/ 태동하는 은갈치의 환희/ 긴 꼬리로 활강하며 획을 긋는 무렵이면// 물품이 된 내 어머니/ 마른 가슴도 부표처럼 떠올라 흔들린다// 물비린내를 타고 솟구치는/ 은갈치 한 마리/ 주름처럼 펼쳐놓은 흰 밥상이/ 어머니가 차린 밥상이라는 것을 알 무렵이면/ 육지로부터 빈 소주병 하나 밀려와 밥상을 서성인다//- 이영숙,「은갈치와 어머니」전문

바다는 여성적인 공간이다. 은갈치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이 땅의 자식들을 위해 차려낸 밥상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셔도 자식들 배곯을까 살림의 밥상을 차리시는 그런 위대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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