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유해 발굴
안중근의사 유해 발굴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9.09.22 19:4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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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경. 하얼빈역에서 울린 4발의 총성은 조국해방의 등불을 비추는 소식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일제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을 향하여 쏘아 올린 총성이다. 이 사건으로 안중근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된 후 중국 여순(旅順)감옥으로 이송되어 수감생활 중 사형을 선고받고 1910년 3월 26일 순국하셨다. 순국 직전에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 달라”라는 유언을 남기었다. 안 의사의 시신은 어머님이 마련해 준 한복 수의를 입은 채 성당에서 마련한 십자가와 함께 가로로 된 침관(枕棺)에 담겼고 찬 봄비 내리는 저녁 마차에 실려 감옥묘지로 향하였다. 이렇게 순국한 지 109년이 지났으나 우리는 아직 그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한 유해 매장지 조사는 정부와 민간차원에서 1986년부터 진행했고, 남북 협력사업으로 유해발굴조사가 추진되기도 하였다. 2005년 6월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안중근의사 유해발굴을 남북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하고, 2006년 6월 남북공동조사단이 유해매장 추정지역 4지점을 현지조사한 후 여순감옥 뒷산인 원보산 하단지역을 가장 신뢰성이 높은 매장지로 추정하였다. 사진, 지도, 평면도, 사형집행보고서, 증언자의 증언 등을 종합하여 판단한 것이다. 그중 사진 1장이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1911년 여순감옥 공동묘지에서 열렸던 위령제를 찍은 기념사진이다. 안중근의사 순국 당시 감옥소장인 구리하라 테이키지(栗原貞吉)의 셋째딸 이마이 후사코(今井房子)가 보관하던 사진으로, 사진 속에 안중근의사 묘의 위치를 화살표로 뚜렷하게 표시해둔 것이다. 기록사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2007년 10월부터 안중근의사 유해매장 추정지가 아파트신축 터파기공사로 묘역 일부가 훼손되었다는 언론보도를 접하게 된다. 이에 급히 안중근의사 한·중 유해발굴단을 구성하여 긴급발굴(2008년 3월 25일~4월 29일)이 진행되었다. 안중근의사 유해매장지 조사가 시작된 지 22년에 첫 유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의미가 크다. 필자에게 이 역사적인 유해발굴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다. 매우 큰 영광이다.

그러나 발굴조사 여건은 최악이었다. 유해매장 추정지는 공사로 지형이 변화된 상태였고, 공안의 엄격한 갖가지 통제, 현지 발굴장비의 열악함, 경험 없는 현장근로자들의 비효율적인 작업태도, 의사소통의 문제, 황사 바람 등 불편과 제약이 많은 조사였다. 조사기간 중에는 여순감옥에서 회의와 점심을 하였고, 발굴지로의 이동은 안중근의사 시신이 운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동경로와 유사하다. 시간을 뛰어넘어 같은 공간에 서로 다른 목적으로 머물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인연이란 생각이 든다.

유해발굴은 고고학적인 발굴방법에 따라 진행하였다. 유해매장 추정지 조사 결과 1916,1921,1923년에 이루어진 감옥소 증축 시 벽돌원료로 점토를 채굴한 흔적과 당시 폐기물 매립장이 확인되었을 뿐, 유해는 찾지 못하였다. 지형변화가 예상보다 심하였다. 결국 아쉬운 마음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올해로 안중근의사 탄신 140주년, 순국 109년이요, 3.1운동 100주년의 축제가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데도 안 의사의 영혼은 찬바람 맞으며 이역 하늘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안 의사가 열망했던 조국이 광복된 지 74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우리는 그의 유언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오직 부끄러울 따름이다. 안 의사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오고자 하는 노력은 꾸준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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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지 2019-09-22 23:26:58
아쉽습니다 ㅜ 하루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오셨음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