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비례 벌금제'는 시작이다
`재산비례 벌금제'는 시작이다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9.09.22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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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핀란드의 한 사업가가 지난 2014년 헬싱키에서 과속운전을 하다 단속에 걸렸다. 시속 50㎞ 제한 구간을 77㎞로 달렸다. 그는 우리 돈으로 1억3700만원의 범칙금을 물었다. 지난 2002년 핀란드의 핸드폰 회사 노키아의 부회장도 헬싱키에서 시속 50㎞ 제한 도로를 75㎞로 달리다 적발돼 범칙금 1억6700만원을 물었다. 2004년에는 핀란드의 대형 소시지회사 상속자가 과속했다가 2억5000만원을 범칙금으로 내는 신기록을 세웠다.

핀란드에서는 경찰이 과속 등 위법운전을 적발하면 세무서에 운전자의 소득과 재산부터 확인한다. 월소득의 14분의 1 정도를 범칙금으로 산정한다고 한다. 똑같은 위법행위에 대한 징벌이 소득과 재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억울함을 법에 호소하는 부자들도 있지만 법원이 편을 들어준 적은 없다고 한다.

핀란드에서 `법 앞에서 만인의 평등'은 징벌의 평등이 아니라 징벌 효과의 평등으로 구현된다. 범법자에게 가해지는 징벌의 효과가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주운전이 적발돼 300만원의 벌금을 물게 됐을 때 월 소득 300만원인 사람과 3억원인 사람이 받게 될 타격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한쪽은 한 달 생활을 걱정해야 할 정도의 고통을 수반하겠지만 한쪽은 껌 값 수준의 지출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이럴 때 부자에게 3000만원 정도는 부과해야 징벌의 체감 정도가 비슷해질 것이라는 게 법적 평등에 대한 핀란드식 해석이다. 핀란드뿐 아니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유럽 일부 국가에서 이 같은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법무부가 핀란드와 비슷한 유형의 `재산비례 벌금제'를 도입하겠다고 한다. 범법자가 벌금형을 받으면 경제적 수준에 따라 액수를 차등 산정해 형벌의 실질적인 형평성을 추구하겠다는 취지다. 개인의 재산과 소득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어렵고 역차별 논란이 벌어질 것이라는 반론도 있지만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법부 불신이 뿌리깊은 우리나라에서는 시험할 만한 제도이다.

그러나 `재산비례 벌금제'는 서민의 박탈감을 위로할 수는 있겠지만,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갈수록 심화하는 양극화와 불평등을 개선하는 근본 제도가 될 수는 없다. 벌금이나 범칙금을 물게 될 부유층으로만 한정한 상대적이고 일회적인 처방일 뿐이다. 서민과 달리 진짜 부자들은 범칙금이나 과태료를 내야 할 일을 직접 하지도 않는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 앞에서 소극적인 정부의 태도를 보면 이 제도가 정부의 사법개혁 의지를 강조하려는 홍보정책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벌금의 평등'은 기회의 평등과 분배의 평등까지로 확장돼야 한다. 상위 주택보유자 30명이 전국에 1만1000여채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1인당 평균 367채씩이고 594채를 소유한 사람도 있다. 평생 뼈 빠지게 일해도 집 한 채 장만하기 어려운 것이 지금 젊은이들의 현실이다. 주목할 부분은 최근 들어 임대주택 사업자와 시장이 급증했다는 점이다. 올해 6월 말 기준 임대사업자는 44만명, 임대주택은 143만채로 집계됐다. 지난 3년 반 동안 사업자는 3.19배, 임대주택은 2.42배나 늘었다. 다주택자들이 불로소득을 날로 늘려가는 현실은 주택보유세 앞에서 꼬리를 내린 정부의 옹색한 조세정책이 초래한 결과는 아닌지 의심스럽다. 기득권 지키기에 개혁이 밀려났다는 의혹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닥으로 떨어진 대한민국의 불평등 지수를 극명하게 보여준 조국 법무장관이 법의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겠다며 `재산비례 벌금제'추진을 발표하는 모습도 어색하다. 그렇더라도 이 제도가 진정한 평등사회, 엄정한 공정사회로 가는 첫걸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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