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 때론 쉬고 싶다
이 가을, 때론 쉬고 싶다
  • 임현택 수필가
  • 승인 2019.09.1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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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수필가
임현택 수필가

 

가을이 영글어간다. 사각지붕을 훑고 지나간 메마른 바람엔 온기라곤 없다. 바람에 서걱거리는 나뭇가지로 떨어지는 가을 한 줌, 햇살 한 줌이 따사롭다. 온몸을 부딪치며 울어대는 갈대가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면 고질병처럼 가을 앓이가 찾아온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세월, 올려다본 낮 빛이 어둡다. 작년 이맘때지 싶다. 꽉 낀 청바지처럼 타이트하게 숨도 고를 새 없이 달려가는 사회생활, 간만에 모임에서 느슨하게 풀린 나사못처럼 여유를 찾고 싶은 우린 밤거리를 배회했다. 회식자리에서 2차 3차로 이어져 나이트 유흥지점에 도착, 한낮 볕처럼 뜨거운 밤거리 별천지 같은 밤 문화는 또 다른 환골탈태이다. 별빛보다 네온 불이 더 쏟아지는 거리에 홀린 듯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불빛 아래로 몸을 맡겼다.

불야성을 이룬 밤거리, 인간은 환경에 지배를 받는다 했던가. 스피커를 빠져나온 음악은 벽을 부딪쳐 가슴팍에 꽂히면서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끼가 꿈틀거려 어깨가 흐느적거린다. 거나하게 마신 술로 모두가 어우러지는 스테이지, 몸 따로 음악 따로 엇박이다. 대나무처럼 뻣뻣한 것이 적응할 수가 없는 난 낯설고 불편한 이방인이었다.

변한 게 있다면 세월의 무게만 더 해질 뿐인데도, 빌딩숲 속에 낀 개밥에 도토리 같은 이방인, 그가 바로 나였던 거다. 서럽다. 의연한 모습으로 늘 겉포장을 하고 성공의 압박감에 자유라는 날개를 잃은 난, 날지도 못하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을 뿐이다. 어찌하다 보니 말린 대추처럼 주름살만 하나하나 더 늘어났고, 아이돌의 댄스를 따라하지 못해 자리지킴만 할 줄이야. 굉음 같은 음악, 현란한 레이저불빛이 쏟아지는 와중에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 난 가을 앓이처럼 홀로 빛바랜 누런 책장처럼 흘러간 시간만 더듬고 있었다. 풋풋한 꽃망울 같던 새내기 신입시절, 짧은 치마에 웨이브 춤사위가 멋지고 하이힐이 어울렸던 그때의 모습이 무대 위에 어른거린다. 회사의 수습기간을 마치고 대추수확이 한참이던 그 무렵 정식사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부모님은 그저 잘 먹어야 한다는 상식에 휴일이면 대추와 한약재를 넣은 삼계탕으로 몸보신을 시켰고,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대추를 말려 늘 끓여 주셨다. 어쩌다 회식이라도 하는 날이면 평소보다 더 진하고 걸쭉하게 끊인 대추차, 한잔이면 만사형통이었다.

불로장생 식품이며 관혼상제(冠婚喪祭)의 대추, 혼인식 날 시어머니는 자손이 번창하라는 뜻으로 폐백 시, 며느리의 첫 절을 받고는 대추를 치마폭에 던져주셨다. 아들을 원하는 속뜻도 있겠지만, 조금 더딜지라도 대추가 푹 끊여지기를 기다렸다 대추차를 마시는 것처럼 시집살이는 대추를 우려내듯 인내하고 기다려주는 미학이 필요했을 게다. 어쩜 내 비록 엇박으로 아이돌댄스를 따라가지 못해도 현란한 레이저불빛 속에서 저들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진한 대추차처럼.

풋대추가 붉은 옷을 갈아입고 한해를 삼키고 있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인장을 만들면 행운이 온다는데, 어디 흔하게 있을까마는 그거라도 품에 껴안고 있으면 가을 앓이가 좀 나으려나. 또 가을이 영글어간다. 나그네가 아니라 진정한 주인이 되고픈 우리, 당신도, 나도 때론 쉬고 싶다. 불타는 이 가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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