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농(力農)의 실학정신이 담겨 있는 정자, 청주 무농정(務農亭)
역농(力農)의 실학정신이 담겨 있는 정자, 청주 무농정(務農亭)
  • 김형래 강동대 교수
  • 승인 2019.09.15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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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김형래 강동대 교수
김형래 강동대 교수

 

무농정(務農亭)은 청주시내에서 보은 쪽으로 가다 시가지가 끝나는 곳인 방서사거리의 왼쪽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정자가 있는 방서동(方西洞)은 본래 청주군(淸州郡) 남일하면(南一下面) 지역이었다. 자연마을로는 너먼대머리(大村里), 대머리(竹村), 방정, 아래대머리, 웃대머리 등이 있었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이 가득한 도심지로 변해 버렸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이 일대는 청주의 외곽으로 과수원이나 채소 농사를 짓던 농촌이었다.

방서동은 방정(方井)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지어진 지명으로, 자연부락명은 대머리이다. 대머리는 대인을 의미하며 큰대(大)와 마을의 방언인 `멀'이 합쳐져 대멀이라 불리었으며 이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변음돼 `대머리'라 불리었다. 청주 한씨의 시조인 고려의 개국공신 한란(韓蘭)과 같은 큰 인물이 살았던 마을이라 해 `대머리'라 불리어 온 것으로 생각한다. 청주 한씨를 지역에서는 일명 대머리 한씨라고도 부른다.

방서동은 청주한씨의 집성촌으로서 `무농정', `무농정 유허비', `방정(方井)', `청주한씨사효각(淸州韓氏四孝閣)', `용지기념비(龍池紀念碑)', `한란유기비(韓蘭遺基碑)'등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대표적인 씨족인 청주 한씨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있다.

청주 한씨 시조인 한란(韓蘭, 853~916)은 충북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에서 아버지 한지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영동에서 학교를 세워 교육에 노력하였으며, 40세 무렵에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으로 이주하였다. 그가 영동에서 청주로 어떠한 이유로 이주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아마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고 북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오자 이를 피해 청주로 이주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 궁예의 후고구려 세력 아래 놓여 있다가 태조가 즉위하자 고려에 귀부한 것으로 보인다.

한란은 새로 이주한 방서동에서 우물을 파서 식수로 사용하고 인근의 넓은 농토를 개척하여 부호가 되었다. 청주의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한 한란은 왕건의 군대에 군량을 대고 또한 종군하여 큰 전공을 세워 후삼국 통일 후 개국벽상공신이 되었고 벼슬이 삼중대광태위에 이르렀다고 한다. 삼중대광(三重大匡)은 고려 초 관계(官階)에서 1등에 해당하는 것이다.

무농정(務農亭)은 한란이 농사를 권장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전국의 수많은 정자가 인문분야 글공부를 위한 후학 양성에 치중한 데 비해 유독 무농정은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치던 것이니 학파로 따지면 실학(實學)에 가깝고 요즘으로 치면 농업기술원에 해당하는 셈이다.

한란이 세운 무농정은 오랜 세월이 지나 허물어져 옛터만 남아 있었다. 1949년에 후손들이 중건한 것도 역시 한국전쟁 당시 사라졌다. 현재의 무농정은 그 터에 1988년에 복원한 것이다.

현재의 무농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이 정자의 특징은 공포의 구성에 있다. 공포는 내부에는 출목이 없으나, 외부에는 1출목을 둔 간결한 주심포 양식으로 하였는데, 기본적인 가구수법이 고려시대 목조건축형식을 모방하여 결구하였다.

한란이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 세웠을 당시의 무농정은 무심천과 넓은 들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이었으나, 지금의 무농정은 나무와 담장에 둘러싸여 있고 앞으로는 6차선 도로가 뚫리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는 등 예전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무농정(務農亭)은 한란의 교육열과 후삼국의 풍운을 담고 있는 역사적 장소로서의 가치가 큰 곳이다. 무농정에 담긴 정신과 의미를 알고, 주변의 관련 유적과 연계하여 찾아보면 느끼는 감흥은 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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