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과 가르침의 만남이 공존하는 향교와 서원
배움과 가르침의 만남이 공존하는 향교와 서원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9.09.10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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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요즘 아이들에게 학교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질까? 옛날에도 모든 사람들이 대학을 가기 위해 노력을 하였을까?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흔히 말을 하는 데 입시 정책은 수시로 바뀌고, 언론은 `교실의 위기'이니, `공교육의 붕괴'이니 하는 표현을 쓰면서 학교 교육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너도나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어릴 적부터 사교육에 매달리고, 온통 나라가 교육에 목숨을 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요즘 우리 현실의 모습이다.

신분제가 존재하던 전통 사회에서 교육의 기회는 일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학교로는 고구려의 태학과 경당 및 신라의 국학 등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국자감과 향교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 초기의 교육기관은 지방의 향교와 서울의 4부 학당, 성균관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에서 세운 관학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소규모의 사학도 인정이 되었으며, 국가에서는 그러한 사학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시대 서원이 등장하면서 향교와 더불어 지방교육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향교와 서원은 뭐가 다를까? 우선 학교를 세운 위치가 달랐다. 국립 학교였던 향교는 대부분 관아가 있는 고을 읍성의 중심지에 세웠다. 향교를 관리하는 주체가 지방 수령이었으므로 이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반면 서원은 고을 중심지인 읍성의 바깥쪽, 그것도 주로 산 쪽 한적한 곳에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교육 효과를 고려해서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한적한 곳에 자리 잡던 것이다.

다음으로 건물 배치에서 차이가 있었다. 향교와 서원에는 교육을 하는 강당과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었는데, 교실이라 할 수 있는 강당 건물은 향교와 서원 모두 비슷하다. 하지만 제사 공간인 사당에선 차이가 있다. 제사 공간을 비교해보면 향교에는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있지만, 서원에는 동무와 서무가 없고, 사당 한 채만 있다. 향교에서는 공자를 비롯해서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학자를 모시므로 여러 채의 사당 건물이 필요했지만 우리나라 유학자만 모시는 서원은 사당 한 채만 있어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또한 향교는 대개 평지에 세웠고, 국립 교육 기관이었기 때문에 건물의 배치 방식이 대개 엇비슷하다. 이에 비해 서원은 산에 지은 데다 사립이었으므로 건물 배치에 있어 다양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서원이 생기기 시작한 초반만 해도 서원과 향교는 경쟁 관계였다. 하지만 점차 서원이 향교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게 되면서 양반 자제들이 주로 서원에 입학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향교에는 평민의 자제들이 들어가는 게 관례처럼 되었다. 그러나 점차 서원의 기세에 눌려 향교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자 결국 조선 중기 이후 훈도(향교의 교사)제를 없앴다. 그 뒤 향교는 점차 교육 기능을 잃어갔고, 고종 31년(1894) 과거 제도가 폐지되면서 사실상 교육 기능은 사라졌다.

우리 고장 충북에도 향교와 서원이 많이 있다. 조상의 얼이 깃든 교육의 장에 들어서면 개인의 입신양명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동량 되고자 노력하던 선조의 열정이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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