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야기 보는 스팸, 먹는 스팸
추석이야기 보는 스팸, 먹는 스팸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9.10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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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두모리에는 이제 사람이 몇 남지 않았다. 한 때는 너댓명에 달하는 대가족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돌담들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드문드문 남은 늙은 아비 어미들은 목소리도 몸놀림도 사뭇 조용하다.

가을 태풍에 쓰러진 벼들과 주체할 수 없이 추락한 사과며 배 등 차례 상에 올려질 과실들이 애절해도, 추석이 다가오는 이맘때면 괜스레 분주해진 마음을 닮아 온몸이 부지런해지는 시절도 있었다.

해마다 기울어지고 있는 빈집 사이로 귀촌한 60대 청년이 마을 고샅 길을 훑으며 하릴없이 어슬렁거려도 일손을 놓쳐버린 늙은 원주민들의 알은 체는 심드렁하기 그지없다.

추석이 되어도, 심술궂은 태풍이 산과 들, 그리고 몸과 마음을 헤집어 굵고 깊게 상처를 내어도 사람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다만 늦은 밤 초저녁 단잠을 깨우는 휴대전화 기척만 들썩일 뿐이다.

두모리는 이제 추석에도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혼자 남은 쓸쓸한 몸에,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놓고 기름칠하면서 부침개를 구워내는 일도 부질없고, 실한 조선 솔잎을 보며 자식들과 나누어 먹을 송편 생각에 군침을 삼키던 일도 싱거운 추억이 되고 말았다.

부부가 나란히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추석은 몸도 마음도 부산한 것이 딱, 사람 사는 세상으로 여겨졌다. 속절없이 세월은 흘러 한쪽의 부부를 잃고 혼자 몸이 되면, 이제 두모리에 사람은 찾아오지 않는다.

혼자 남은 반쪽의 늙은이는 할 수 없이 쓸쓸하게 자식들을 찾아 추석 때만 되면 차멀미를 참아가며 대처로 나선다. 문의 장날 마트에서 사온 스팸을 들고, 그리운 피붙이를 보기 위해 집을 나선다.

쇠고기 서너근 끊어 회푸대 종이에 둘둘 말아 팔뚝에 차고, 백화수복 한 병 간신히 들며 만원버스이거나 콩나물시루 같이 빼곡한 기차에 오르던 추석맞이는 가난했으나 넉넉했다.

지금은 밀폐의 시대. 푸줏간이든 정육점이든 선홍색 싱싱함이 뚝뚝 흐르던 생고기는 공장에서 잘라지고 익혀져 깡통에 갇히고, 그 육식의 편리함이 추석선물의 대명사 스팸으로 자리 잡았으니, 먹는 일조차 닫힌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손주들이 좋아하니 `먹는 스팸'을 선물세트로 준비하기는 했는데, 좁은 깡통 안에 든 음식을 먹으며 더 넓고 열린 마음을 기대하는 일은 어쩐지 불안하다.

스팸은 먹는 일에만 스팸, 스팸하면서 우리를 자극하지 않는다.

순간의 여유마저 용납하지 않겠다는 전투력으로 무장하면서 무작위로 쏟아지는 광고성 우편물 스팸의 홍수는 또 어떤가. `보는 스팸'은 종류도 다양하기 그지없다. 스팸은 `인터넷상의 다수 수신인에게 무더기로 송신된 전자 우편(e-mail)메시지, 또는 다수 뉴스그룹에 일제히 게재된 기사, 우편을 통해 불특정 다수의 수취인에게 무더기로 발송된 광고나 선전 우편물'<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TTA) 정보통신 용어사전> 등 방대한 일가를 거느리고 있다. 그 영역은 끊임없는 유사 종족의 배양을 거쳐 SNS이거나 유튜브, 인스타그램으로 세력을 넓혀 가면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도대체 분간하기 어려운 혼돈의 질서를 만들고 있으니, 이 또한 무진장 열려 있으되 사실상 주입과 강요, 편 가름의 진영논리에 갇히게 하는 밀폐의 다른 이름이다.

100만 건이 넘는 기사가 뒤덮였고, 여전히 미진이 남아있는 조국 법무부장관에 대한 이야기를 그동안 나는 외면해 왔다. `개혁'이라는 대의명분이 있으나 이는 결국 과거와 결이 다른 과거의 충돌이나 다름없다. 청산되지 못한 친일과 개발독재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과거와, 반독재 민주와 정의를 표방했던 과거의 격렬한 대치는 이제 변곡점의 절정에 도달했고, 그 양방은 사람이 모일 것으로 예상되는 추석 연휴를 극심한 선전의 장으로 만들 태세다.

두모리에는 이제 추석명절에도 사람이 오지 않는다. 일일이 손길이 닿아야 하는 명절 음식도 만들지 않고, 오히려 사람 없는 빈집과 잠시 사람이 출타한 빈집만 남아 쓸쓸한 가을바람과 스산한 달빛으로 채워질 것이다. 법은 멀리 있고, 사람이 그리운 정은 스팸 캔 뚜껑 따는 것처럼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으니, 제발 사람들끼리 시시비비 없는 추석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되길 간절하게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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