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달빛이 가장 좋은 밤
한가위, 달빛이 가장 좋은 밤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19.09.0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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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내 기억 속 엄마는 추석이 다가올 즈음이면 며칠 전부터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집안 구석구석 먼지를 털어내느라 하루를 소비하고 다락방에 쌓아 둔 제수용품들을 마당으로 끌어내 반질반질 윤을 내느라 또 하루를 소일했다. 몇 종류의 김치를 담그고 명절날 차례상에 올릴 음식 재료 준비 등 엄마의 젖은 손은 하루도 마를 새가 없었다. 얼룩진 앞치마는 당신의 허리춤을 감싸고돌아 마치 제 집 인양 언제나 떠날 줄을 몰랐다.

오래된 옛집의 낡은 문에 창호지를 새로 바르는 일에도 또 하루가 들어갔다. 가을볕이 가장 맑고 좋은 날에 엄마는 이 일에 공을 들였다. 아버지가 방마다 문을 떼어 마당에 펼쳐 놓으면 엄마는 능숙한 솜씨로 빛바랜 창호지를 벗겨 냈다. 그리고 누워있는 문살을 향해 입 안 가득 물 한 모금을 물었다가 내뿜어 누런 창호지를 벗겨 내는 일은 언제나 내 눈을 반짝이게 했다. 가을 햇빛과 맞닿아 일곱 빛깔 무지개를 탄생시키는 재주가 언제 보아도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그렇게 어린아이 세수하듯 말끔히 벗겨 낸 문살에 엄마는 아버지와 호흡을 맞춰 양쪽 균형을 잡아가며 새 창호지를 붙였다.

하얗게 새 옷으로 갈아입은 문들을 햇빛 속에 뉘여 말리는 동안 엄마는 대문 밖 길가에 흐드러진 색색의 코스모스를 따 와 마지막 작업을 하셨다. 그것은 바로 문고리 근방에 코스모스 잎을 한 장씩 떼 내 꽃모양으로 내려놓은 다음, 쓰고 남은 자투리 창호지를 덧대어 바르는 일이었다. 그 일에 집중하고 몰두하는 엄마 옆으로 나는 쭈그리고 앉아 손을 턱에 괴고 일이 모두 끝날 때까지 구경을 했다. 문창살에 꽃잎을 수놓는 그 순간 엄마의 눈은 햇빛처럼 반짝거렸다. 꽃잎 한 장을 내려놓을 때마다 숨이 멎듯 바람도 숨죽여 고요했다. 붉은 꽃잎을 얹어보았다가 다시 연분홍 꽃잎을 올려보고, 무언가 아쉬운 듯 나뭇잎으로 바꿔 보기도 하며 여러 번 반복했다. 당신의 마음에 들게 꽃잎이 자리를 잡으면 엄마는 비로소 만족스러운 미소로 나를 한 번 쳐다보곤 일을 마무리하셨다. 방문마다 조금씩 다른 문양과 색의 꽃들은 겨우내 우리집안을 화사하게 봄처럼 만들었다.

내가 유년기를 넘기고 학창시절 어느 즈음엔가 대대적인 집수리가 있었다. 가장 먼저 흙담집에 빨간 벽돌 옷을 덧입혀 외관을 갖추고 마루에는 커다란 창문을 달아 거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전체 분위기에 걸맞게 방마다 창호문 대신 튼튼한 갈색나무 문짝으로 갈아 끼웠다. 더 이상 엄마는 창호지를 새로 바르지 않아도 되었다. 꽃잎을 이리 놓을까, 저리 놓을까 고개를 갸웃하던 모습도 그날 이후 사라졌다.

지금도 추석이 다가오면 떠오른다. 바람이 청량한 어느 가을, 햇빛 가득한 마당 한가운데 나란히 앉아 함께 창호문에 코스모스를 수놓던 시간, 그때가 좋았다. 하루에도 열댓 번씩 여닫는 방문에 늘 피어 있던 꽃, 그 꽃잎의 그림자는 달빛이 가장 좋은 밤에 나의 방 창호문을 타고 넘어와 내가 덮은 이불 위에 수를 놓으며 정점을 찍었다. 가만히 손을 내밀면 내 손등 위에도 내려앉은 꽃잎들……. 엄마는 언제나 하루를 일 년처럼 고단한 삶을 사셨지만 늘 시간과 공간의 틈 사이사이로 내게 아름다운 감성을 많이 심어주셨다. 돌아보니 내 생애 가장 큰 자산이고 감사함이었다. 다가오는 추석에는 내 아이에게도 환한 달빛 아래 그 자산을 나눠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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