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추석
2019년 추석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19.09.0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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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제법 선선해진 바람을 타고, 바지랑대 끝에 앉은 고추잠자리가 빨랫줄에 앉은 다른 잠자리와 자리를 바꿔가며 가을 햇살을 만끽하는 날이다. 평일보다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는 방 문짝을 떼어 뜨럭으로 옮긴다. 휴일, 간만에 이불 속 게으름을 피우는 행복을 깨는 부산함이다.

안방 문짝부터 골방, 사랑방, 윗방, 건넌방 문짝까지 죄다 떼어다 뜨럭에 기대 놓는다. 그리고 바가지로 물을 떠 입에 한 모금씩 물고는 문짝에 불어댄다. 볼이 상기돼 힘들다 싶으면 방 빗자루에 물을 묻혀 문짝에 바르고 작년 이맘때 바른 묵은 종이를 떼어낸다. 문틈으로 새어나온 그을음이 배인 문틀 뒤로 새하얀 백골이 속살을 드러낸다. 워낙 문틀 색이 이랬구나! 지난해 바른 창호지를 모두 벗어버린 본래 문짝이 새삼스럽다.

빨랫줄에 앉아 있던 고추잠자리는 비행실력을 자랑하듯 하늘 높이 위치를 옮겨 유유자적하고 있는 시간, 아버지는 준비해준 창호지를 툇마루에 널어놓는다. 이윽고 엄마는 전날 쑤어놓은 풀을 내었다. 풀비로 풀칠 한 창호지를 문짝에 발랐다. 안방 문짝에는 유리를 덧댔다. 할머니가 문을 열지 않고 밖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사랑방 문짝에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코스모스 꽃잎과 국화잎을 따다 장식을 했다. 장식 위에 한지를 덧댄, 이른바 꽃누름이다. 아마도 손잡이 옆 보강장치였을 듯하다. 한 뼘 남짓 창호지를 덧댄 곳에 고추잠자리 날개는 작은 코스모스 꽃잎이 되어 떼 지어 날고 있다. 떼 지어 하늘을 나는 잠자리를 옮겨놓은 문짝은 풀을 잔뜩 머금은 창호지를 엎고 뜨럭에 비스듬히 자리를 잡아 누웠다. 잠자리는 더욱 높아지고 문짝에 자리 잡은 창호지는 새하얗게 변했다. 흰 창호지에 반사되는 빛에 작은 눈은 더 이상 뜰 수 없게 되고 잠자리는 정지비행을 한다.

해마다 겹겹이 더해지는 도배도 이맘때 치러지는 연중행사의 하나이다. 간혹 풀칠을 잘못해 풀이 말라 하늘로 올라 양털이 되고 새털이 되는 때의 수고로움이다.

할머니는 타온 목화솜을 넣어 이불 소창을 꿰매고, 하얀 천을 덧대 시침을 한다. 솜이불을 덥기에 이르다고 했지만 쌀쌀해진 새벽 나절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할머니의 걱정이었다.

벌초를 하는 아버지 옆에서 엄마는 솔가지에서 솔잎을 뽑는다. 송진이 묻어 손끝이 까맣게 돼도 멈출 수 없는 손놀림이다. 쌀을 빻아 송편을 빚고 찔 때 켜켜이 쌓는 데 쓰려는 것이다. 꼭 조선솔을 고집하다 보니 채취하는 양이 많지 않다.

마당 가득 고추, 콩, 도토리 등 가을걷이를 널어놓고, 해 질 녘까지 몸이 쉴 수 없는 이유는 곧 집을 찾아올 가족을 맞이하려는 것이다. 가족을 그리는 시간이 길어 늘 가족 걱정을 하시는 아버지는 말없이 자신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육신을 움직여 매년 가족 맞이 행사를 치렀다. 멀리 타국에 사시는 큰아버지를 비롯해 형제들과 사촌들이 매년 모이는 큰 행사를 앞둔, 고향을 지키는 아버지의 몫이었다.

가족이 모이는 공간의 새 단장은 매년 반복되는 행사지만 다른 그림이다. 매년 다른 문양으로 바뀌는 벽지는 여러 층을 이뤄 합지가 되었고, 문짝에 수놓는 꽃잎은 뜰 안에 매년 새로 심은 것들의 화폭이 되고, 멀리서 찾아오는 가족을 위한 댓돌은 몇 개 더 놓였다. 숨이 죽은 베갯속에 왕겨를 더 넣고 베갯잇도 풀을 먹여 빳빳이 했다. 속이 꽉 찬 베개는 시침하기도 힘겹게 만들어졌다. 살이 오를 대로 오른, 꽉 찬 베개는 모처럼 나란히 누워 방을 가득 채울 가족의 풍족함이었다. 새로 바른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새로운 공간을 채우고도 남음이었다. 그렇게 매번 추석을 맞이했다.

예전같이 비행실력을 자랑하는 잠자리는 볼 수 없고, 매년 문창호지를 바르지 않아도 가을은 깊어지고, 추석이 바로 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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