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치 백
스위치 백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19.09.0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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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엄마! 기차가 이상해. 거꾸로 달려. 왜 그래?”아이의 야단스런 목소리가 들린다. 놀란 얼굴은 눈이 왕방울처럼 커져 있다. 앞으로 달려야만 하는 기차가 뒤로 가는 것이 이상한 모양이다. 혹시 고장 난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섞여 있는 눈치다.

너댓 살 되는 아이는 제 엄마의 찬찬한 설명에도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해가 될 리 없다. 그래도 잘 달리는 기차에 안심되는 듯 “와”하는 감탄사를 쏟아낸다. 나도 아이만큼이나 신기하다. 말로만 듣던 이색경험에 함께 소리를 지를 판이다.

앞만 보고 달리던 기차가 갑자기 뒤쪽을 향해 거꾸로 되돌린다. 한참을 물러서더니 다시 앞으로 치달아 준령을 지그재그로 넘는다. 후진의 힘으로 넘기 버거운 고개를 냅다 밀어올리는 철로다. 구 영동선 철도의 폐선구간에 설치된 산악형 철길로 실제로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 터널이 뚫리면서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 구역을 관광열차로 운행하고 있다.

둘은 하회마을 앞에서 승강이를 벌였다. 느린 걸음으로 자세하게 풍경을 담으며 돌고 싶은데 걷기 싫어하는 그이의 고집은 제동이 걸린다. 전동차로 한 바퀴 휙 돌고 나니 허무하기 그지없다. 글을 읽던 유생들이 밤참으로 먹었다던 헛제삿밥을 먹으며 허전한 속을 달래본다.

그이가 전동차를 타면서 이 기차에 대해 이야기할 때 놀랐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여 혹처럼 달라붙는 호기심을 나중으로 미루어 놓는다. 당도해 있는 안동에 집중하기로 한다. 점심이 끝나 다음 코스를 정하려는데 느닷없이 삼척으로 가자고 하는 것이다.

갑자기 여정을 뒤집는 그이가 못마땅하다. 여행지를 안동으로 선택한 장본인이 중간에 번복하니 말이다. 지역의 볼거리를 더 보고 느끼면서 일정을 끝내고 싶은데 난데없는 기차 타령이 길다. 그이의 억센 주장을 꺾지 못해 반 억지로 왔지만 와 보니 슬며시 꼬리를 내리길 잘했다.

여행이란 둘 다 즐거워야 한다. 대립이 되면 우리는 서로 말문을 꾹 닫는 버릇이 있다. 분위기는 싸해지고 기분도 내려앉아 더 이상 동행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의견의 엇갈림에서 끝내 지지 않고 굽히지 않았더라면 여행을 망쳤을지도 모른다. 중간에 다 접고 집으로 방향을 돌렸을 수도 있다. 결국 후회로 남는 여행이 되었을 수도 있다.

결혼 초에는 서로 맞서기가 일쑤였다. 마주 보고 찔러댄 상처로 보이지 않는 혈흔을 내세워 나의 아픔만을 드러냈다. 한번 다투고 나면 상처가 치유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앓곤 했다. 이기적인 생각은 상대의 고통을 가려 보이지 않았다. 같이 산 세월이 늘어나면서 조금씩 물러나는 지혜가 생겼다.

이번 여행의 콘셉트는 느림의 미학이다. 천천히 시간을 즐기고 싶다. 떠나기 전에 먼저 나선 설렘은 다니는 동안에도 사그라질 줄 모르고 고른 숨으로 유지된다. 처서의 이름값을 하는지 덥지도 춥지도 않아 날씨도 좋다. 전동차로 인하여 느림에 역행했다면 기차는 순행이다. 들큼한 바람이 불평을 날려버린다.

기차에서 알았다. 늘 앞으로 달릴 것만 같은 기차가 뒤로 후퇴하는 법을. 경사가 가파른 구간에서의 목적지에 오르는 방법. 전진하다가 퇴행 운전하여 경사를 따라 이동한 다음 다시 전진하여 경사를 극복하는 방법. 스위치 백이다.

오늘, 삶의 여정에 놓인 후진을 생각해 본다. 삼척에서의 스위치 백은 인생에 모랫바람이 불어 앞이 캄캄한 사막이라고 느껴질 때 신기루로 나타나줄 것이다. 그럴 때마다 힘든 고비를 이끌어 올리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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